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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
<시와 환상> 2013년 봄호 권두 대담
늘 푸른 시의 방
대담자: 강인한(시인), 서안나(시인),
사진 촬영: 채선(시인)
장소: 북스리브로 홍대점
일시: 2013, 1, 16
정리, 기록 : 서안나(시인)
아버지의 창작 노트와 잃어버린 일기장
2013년이 시작되는 1월의의 저녁에 강인한 선생님과 만났다. 등단 오십 년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이 젊은이보다 더 청청하다.
강인한 시인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대운동회 만세소리」로 등단했다. 등단 전에 제1시집 『이상기후』(가림출판사, 1966), 등단 후 7년 만에 제2시집 『불꽃』(대흥정판사, 1974), 제3시집 『全羅道 詩人』(태‧멘 기획, 1982)(초판 5천 부 발행. 1982년 전남문학상 수상) , 제4시집 『우리나라 날씨』(나남출판사, 1986),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문학세계사, 1992), 시선집 『어린 신에게』(문학동네, 1998), 제6시집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1999), 시론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시와사람사, 2003), 제7시집 『푸른 심연』(고요아침, 2005), 제8시집 『입술』(시학, 2009), 제9시집 『강변북로』(시로여는세상, 2012) 등 총 9권의 시집과 시론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등을 출간하면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이다. 그리고 다음에서 <푸른 시의 방>이란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여 독자들에게 좋은 시를 소개해주고 있다.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던 날은 20년 만에 처음 찾아온 강추위가 서울을 강타하던 날이었다. 선생님과 아담한 카페에서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했다.
서: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독 날씨가 춥습니다. 한파가 심하게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다음의 〈푸른 시의 방〉에 게시되는 좋은 시를 자주 읽습니다. 늘 시에 대해 고민하고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치고 계신 선생님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강: 서안나 시인. 오랜만입니다. 내가 시를 써온 기간에 비해서 학문적 이론은 미약해요. 단지 경험으로 체득한 시에 대한 이론이 아주 쪼끔 있을 뿐이니, 아프지 않게 살살 질문해 주세요. (웃음) 잘 부탁할게요.
서: 네.(웃음) 선생님 존함이 특이합니다. 필명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만큼 개성적인 필명이라 생각됩니다. 필명은 직접 작명하신 것인지요? 필명과 선생님의 시 작업과의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는지요.
강: 본명인 동길(東吉)이 실은 더 좋은데, 너무 어린 느낌이 들어 싫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 내 손으로 필명을 지었어요. 인(寅)은 셋째 지지 인, 동방 인, 새벽 인 자, 한(翰)은 날개 한, 높이 날 한, 글 한 자입니다. 인(寅)자가 지니는 호랑이, 새벽이란 뜻에다가 붙여지는 이미지가 멋져서—호랑이의 날개, 호랑이의 글, 새벽의 날개, 새벽의 글 같은 이미지 조합이 좋아서 만든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姓)과 함께 부르면 갑자기 장난스런 이름이 되고 말죠.(웃음) 보시다시피 별로 강인하게 보이지도 않은 주제에…….
서: 그러시군요.(웃음) 문단 행사에서 자주 뵙기는 했지만, 막상 대담 자리에서 선생님을 뵈니 이전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먼저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프로필을 보면 고향이 정읍으로 되어있습니다. 언제까지 정읍에서 사셨는지요.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나 유년시절의 선생님의 모습은 어떠셨는지요. 그리고 선생님 시에서도 “아버지가 끄을려 가고 있었지./ 먼 데 개 짖는 소리 속으로/ 그 어둠 속으로 아버지는 끄을려 가고 있었지./ 우리사 아무 죄도 없응게,/ 걱정 마라, 후딱 오마./어머니는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었지.(「전라도여 전라도여」부분)를 보면 아버지의 투옥과 관련한 내용도 볼 수 있는데요.
강: 정읍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세무서 직원이셨습니다. 6. 25 당시에 아버지가 지금의 익산인 이리 세무서 서장을 지내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국세청 과장에 해당하는 자리였지요. 당시 인민군과 대치상황 때 아버지께서 교도소에 끌려가셔서 고통을 당하시다가 전쟁 말미에 인민군이 퇴각할 때 구사일생으로 형무소를 탈출하셔서 이리까지 맨발로 걸어서 오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투옥되었던 감옥에 소설가 하근찬 선생의 부친도 함께 계셨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수복되고 난 후 광주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성격이 무척 청렴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세무서장을 지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집 한 채나 변변한 땅 한 평을 남겨두시지 않았지요. 그런데 강직하고 꼿꼿하시기도 하신반면, 글과 그림을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감성 역시 지닌 분이셨어요.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쓰신 창작 수첩 노트를 보게 되었고요. 대학 노트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노트에 70∼80페이지 정도 분량의 글이 적힌 노트였습니다. 수채화를 그린 스케치북도 한 권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이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부친께서 쓰셨다는 창작노트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부친이 쓴 창작노트가 선생님을 시인의 삶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는지요. 그리고 부친께서 마흔다섯에 이리세무서장이셨다면 당시로써는 고위직 공무원이셨는데요. 어릴 적 삶이 별 무리 없이 유복한 삶을 지내셨겠네요. 보통 시인은 결핍에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요. 시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는지요?
강: 아버지의 창작 노트를 보고 저도 나중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고교 문예반 시절 인쇄소에서 구한, 교지 준비를 위한 가제본 두꺼운 노트에 하루에 최소한 한두 페이지 정도 글을 쓰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일기를 대학 3학년 때까지 열심히 썼어요. 대학 3학년 때까지 계속 긴 글을 써 버릇해서 긴 글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는 고등학교 때 처음 접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고등학교 때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펜팔을 했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핸드폰으로 소식을 전하기보다 주로 편지를 많이 이용했던 시절이었죠. 저도 강원도에 사는 한 여학생과 펜팔을 시작했었어요. 그때 그 여학생이 하얀 조가비를 선물로 보내온 적이 있었어요. 그 인연으로 결혼 직후 「하얀 조가비」란 노래 가사를 작사하기도 했어요. 결혼 후에도 여학생이 준 선물과 일기장을 아내 몰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자물쇠로 잠가두었어요. 나 혼자만의 추억의 저장소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낡은 책상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읽을 수 없는 일기가 되고 말았지요.(웃음)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해서인지 저 역시도 그림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런 이유로 저도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미술반에 가입했었지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문예반으로 편입하게 되었지요.
서: 네.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시와 함께 한 낭만적인 고교 시절의 추억이 있으셔서 행복하시겠어요.(웃음) 당시에는 문인 수도 많지 않고, 또 고교생들 또한 시에 대한 열정과 몰입도가 지금의 학생들과도 다르리라 생각해봅니다. 제가 듣기로는 당시에 《학원》이란 잡지가 굉장히 유명했던 걸로 압니다만.
강: 맞아요. 그 《학원》지에 전주고등학교 강동길의 시도 몇 번 실렸지요.
서: 아, 그러셨군요? 그리고 선생님의 두 번째 시집인 『불꽃』에 보면 시집 서문에 “존경하는 辛夕汀 스승님께 바칩니다.”라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신석정 선생님과의 인연도 말씀해주세요. 언제 인연을 맺으신 건지요?
강: 그 당시 전주고등학교에 문예반이 있었고 국어 선생님으로 신석정, 백양촌 신근 선생님, 김해강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리고 1962년 무렵 《현대문학》으로 추천 완료로 등단하신 박희연 선생님도 학교에서 작문을 지도하고 계셨지요. 그러니까 시인 네 분이 학교에 재직하신 거여요. 대단하였지요.
제가 문예반에 가입하게 된 인연이 재미있어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박희연 선생님께서 방학숙제로 시, 수필, 소설 중 자유롭게 선택하여 작품 한 편을 제출하라고 하셨지요. 그 중 잘 쓴 작품을 뽑아 교지에 실어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때 제가 처음으로 동화를 쓰게 되었는데 아마 원고지로 50여 매 정도를 썼던 것 같아요. ‘복실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동화였어요. 방학이 끝나고 동화를 제출한 후 9월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문예반 1년 선배가 저를 찾아왔어요. 신석정 선생님께서 저를 보자고 하신다더군요. 당시 문예부 총괄 지도교사가 바로 신석정 선생님이셨거든요.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뵈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쓴 동화를 교지에 실으려 했는데, 선생님의 개구쟁이 손자가 동화원고의 끝 장을 뜯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놀다가 잃어버렸으니 다시 보충해서 작품을 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결말을 더 늘려 원고지로 네댓 장을 다시 썼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문예반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우스운 인연이라 할 수 있지요.
당시 《학원》이라는 잡지엔 학생들의 산문(콩트)은 20매 안팎. 그 무렵 《현대문학》에 실린 기성작가들의 단편소설이 70∼80매였어요. 전주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우리들은 이미 소설을 쓴다 하면 으레 기성작가나 된 듯 원고지 100매 정도를 곧잘 쓰곤 했어요. 다른 시내 고등학교 동아리와는 상대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문학 습작기를 거친 셈이지요.
20번 응모 끝에 시인이 되다
서: 네. 한 학교에 무려 네 분의 시인이 국어 교사로 계셨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학교의 풍토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탄탄한 습작활동과 신춘문예 응모의 촉발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 이력을 보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셨는데요. 이때 등단작품이 「대운동회의 만세소리」입니다. 이 작품은 월남 파병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어도 무게감이 있고 현실 비판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동아일보 당선 취소가 된 작품 「1965년」에서도 월남 파병을 문제를 다루어 전쟁에 대한 비극성과 묵직한 사유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1965년에 이미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신 앞에서」로 입선되었고, 동아일보로 신춘에 당선되셨다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6년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졸업하시는 해에 당시 김광림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현대시학》에 「귓밥파기」라는 시로 1회 추천을 받으셨고요. 같은 해에 1시집 『이상기후』를 출간하셨네요. 그리고 1967년에 조선일보에 등단과 더불어 제6회 신인예술상에 「임진강」으로 시조부문에도 수석 당선이 되셨군요. 마치 양파를 까듯 알면 알수록 선생님의 창작활동 이력과 시의 스펙트럼이 넓고 깊음을 알게 됩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습작 시절과 아울러 문청시절을 거치면서 첫 시집과 등단까지 에피소드가 많을 듯합니다.
강: 조선일보 등단 1년 전에 동아일보에 시가 당선되었었어요. 「1965년」이라는 작품이었고 12월 24일에 동아일보에서 당선 통지가 오고, 당선 소감도 보냈었지요. 그런데 제가 그 해 12월 15일 자 전북대학신문에 시를 발표했었는데 그 이유로 동아일보 신춘 당선이 취소되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그래서 1년 만에 재도전하여 조선일보 신춘에 당선되었지요. 시만 파고든 덕분에 조선일보에 당선되던 그 해에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등 일간지에 세 군데 모두 최종심까지 오르는 행운도 맛보았어요. 그 시절에는 미련할 정도로 온통 시에 열중하고 의욕이 충만하던 시기였어요.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란 생각에만 몰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시절 많은 입상경력이 취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대학 시절에 흥미로웠던 것은 대학신문사의 학생 기자 활동이었어요. 그 당시에 대학신문에서 학생 기자가 처음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대학 1학년 때 대학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문학에 관련한 정보를 얻고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원래 계획은 대학재학 중 신춘에 등단하려는 욕심이 있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졸업하고 이듬해에 등단한 셈이지요. 제대로 했으면 만 22세에 등단할 수 있었을 거예요. 따져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려 스무 번 가까이 신인작품 공모나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낙선하면서 어렵게 등단한 셈입니다. 물론 대학시절에 수없이 도전하면서 낙선할 때마다 저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우울한 문청 시절을 겪기도 했어요. 당시만 해도 신춘문예나 《사상계》 신인상으로 등단하는 게 문청의 꿈이었거든요. 물론 아는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추천 등단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신춘문예에 도전 했어요.
서: 네. 스무 번 가까이 신인작품 공모나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낙선했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시간이 선생님의 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시 세계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선생님이 기존에 출간하신 시집이 모두 9권입니다. 선생님의 시 세계를 제 나름으로 나누어 보면 총 3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1기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제1시집 『이상기후』(가림출판사, 1966)와 제2시집 『불꽃』(대흥정판사, 1974)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기는 80년과 90년대 초반까지 출간한 제3시집 『全羅道 詩人』(태‧멘 기획, 1982), 제4시집 『우리나라 날씨』(나남출판사, 1986),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문학세계사,1992)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마지막 3기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에 출간한 제6시집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1999), 제7시집 『푸른 심연』(고요아침, 2005), 제8시집 『입술』(시학, 2009), 제9시집 『강변북로』(시로여는세상, 2012)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자신의 시 세계를 나누어 본다면 어떻게 시기 구분을 하실 수 있는지요.
강: 안나 시인이 잘 나눠 주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살펴보도록 하지요.
서: 네. 먼저 1기에 해당하는 시 세계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제2시집 『불꽃』후기를 보면, 1966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쓴 3백여 편 중에서 101편만 골라 두 번째 시집으로 묶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 시집이 1966년에 출간되었고 1967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불꽃』 시집이 등단을 시작으로 이후 7년까지의 창작 즉, 20대 시절의 시작활동을 아우르는 의미 있는 시집이라 생각됩니다.
시집『불꽃』에는 연작시가 많습니다. 총 3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1부는 「불꽃」연작 시편이고, 2부는 「눈먼 사내」 연작 시편입니다. 신덕룡 평론가의 글(《원탁시》48집(2004. 5.1)에 발표된 특집 기획)을 참고할 때 “따뜻한 등불을 찾아 나서는 사랑에 관한 서정시편을 통해서는 사랑을 통해 꿈을 일궈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조로 삼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등불을 위협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개인적인 것을 넘어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우리 삶을 왜곡시키는 모순에 대한 탐색이며, 분단이라는 민족의 현실, 독재자의 폭력에 대해 절망과 분노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의 모습을 보이며 전개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사랑에 관한 서정시편과 「1965년」과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등 일련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실 비판의 세계가 혼재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현실 비판의식은 2기로 들어서면서 광주 관련 현실인식과 맞물리면서 시인의 시정신이 더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어두운 시대의 독재정치 탄압 아래서 시인이 체험한 비애와 좌절감이 닿을 수 없는 부재한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관통하는 1기 작품에 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 첫 시집에 대한 일화 한 가지. 그 시집은 문고판 크기였고, 신춘에 당선됐다가 좀 억울하게 취소당한 「1965」이며 전북일보 신춘에 당선 없이 가작 입선한 「당신 앞에서」라든지 청구대학, 고려대학, 경북대학 대학생 현상문예에 당선한 「인형」, 「내 이마의 꽃밭에서」, 「死者共和國」 등 습작시 30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을 아마 3백 부 찍었을 겁니다. 친구들에게 주로 나눠주고, 경희대 국문과에 다니는 친구에게도 몇 권 주었는데 그 친구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전주고 3년 후배가 그 시집 속의 시들을 늘 암송하다시피 좋아했나 봐요. 그 시집 속의 시들 여기저기에서 구절구절 따다가 짜깁기하여 1968년 신춘문예에 당선했습니다. 좋게 보면 혼성모방, 엄정하게 보면 열 군데쯤 내 시구들을 표절해서 당선한 건데 그 후배는 전혀 표절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어요. 지금은 가고 없는 시인이지만….
몸으로 겪은 광주민중항쟁
서: 네. 그런 에피소드가 있으시군요. 선생님의 1기 시 세계에 이어 2기에 해당하는 작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출간한 제3시집 『全羅道 詩人』, 제4시집 『우리나라 날씨』,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까지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선생님의 나이가 30대에 해당하는데요. 당시 시대상황과 선생님 개인적 체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시기 작품의 화두는 광주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이 그 핵심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全羅道 詩人』의 해설을 장석주 선생님이 쓰셨는데 이 해설 내용이 당시 시대상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내용이라 군 계엄당국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광주가 갖는 의미는 선생님에게도 개인적인 체험과 더불어 남다르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시에서도 광주민중항쟁 당시 상황이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선생님의 2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현실 비판 인식의 경우, 독특한 지형을 선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민중항쟁 관련 내용을 소재로 삼고 있음에도 시적 발화가 직접적인 감정노출이기보다는 알레고리와 상징 등을 통해 냉정한 객관적 거리두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광주민중항쟁을 체험한 선생님의 원체험을 생각할 때 시가 구호화하거나 주관적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절제미를 바탕으로 시의 미학성을 구현한다는 점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요.
강: 어떤 상황에서도 시에는 미학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실인식을 시에 드러낸다고 할 때도 시가 선동구호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미학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는 구조화되고 작품으로서의 완결성도 지녀야 합니다. 제 시가 정치현실을 다루었을지라도 단순히 표면적인 정치 현실을 보여주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현실을 알레고리와 상징 등으로 변용하여 미학적으로 승화해야만 했습니다. 외부로의 통로가 꽉 막힌 채 고립된 도시에서의 열흘 동안. 거기서 자행된 학살의 비극, 이것을 나는 화분에 갇힌, 허공에 높이 뜬 꽃으로 형상화했지요. 금남로 가로변에 울음빛으로 피어있던 「팬지꽃」이라는 광주 민중항쟁을 다룬 시가 있습니다. 유신 말기에 발표한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도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시로서 언론의 자유가 없는 절망적인 독재의 시대를 표현한 시였지요.
서: 네. 「팬지꽃」이란 시 일부를 보면 “허공에 높이 떠 있습니다./ 내려갈 길도, 빠져나갈 길도/ 흔적없이 사라진 뒤/ 소문에 갇힌 섬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처럼 광주 민중항쟁 당시의 비극성과 절박함을 잘 구현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이와같이「팬지꽃」을 비롯한 선생님의 2기 작품에서 ‘광주’라는 특정 공간과 역사의식에 관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3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에서는 또 다른 미적 지향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3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최근 선생님께서 발표한 시집까지 아우를 수 있는데요. 이 시기 작품에서는 문명 비판적인 시선과 언어 감각의 조형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6시집 『황홀한 물살』, 제7시집 『푸른 심연』, 그리고 근간에 출간한 제8시집 『입술』, 제9시집 『강변북로』인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실 때 이전 출간 시집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강: 등단하고 오늘까지 만 47년. 그동안 시를 쓰며 시가 무엇일까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학을 언어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시는 ‘언어의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보석을 빛나게 하는 광채는 무엇이겠는가? 그 요체는 시인의 영혼이라 생각합니다. 즉, 시 정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언어의 예술 혹은 언어의 보석이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며 미학의 추구가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까지는 광주에 살며 출간하였고, 그 이후 『입술』과 『강변북로』는 서울로 정착한 후에 쓴 시를 모아 출간한 시집들이지요. 확실한 건 90년대 말에 들어서부터 내 시에서 참혹한 정치적 현실의 잔재가 걷히기 시작했다는 걸 거예요. 그 대신 순수 서정 내지는 인생에 대한 관조로 나아간 것이 『푸른 심연』까지의 작업이고 그 이후로는 조형미 내지 구조미의 세계에까지 관심의 폭을 미학으로 더욱 넓혀가고 있다고나 할까요.
천 편의 필사, 시와의 직접 대화
서: 네. 선생님의 시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온라인 카페로 화제를 옮겨볼까 합니다. 요즘 문단에서 시를 쓰거나 시를 공부하는 시인 지망생들 중에서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카페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가 무엇인지 알려면 좋은 시 천 편을 필사하라”는 구절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날마다 업데이트해야 하는 카페 운영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카페를 운영하시는 선생님의 상당한 공력이 있어야 하는 작업일텐데요. 요즘 발행되는 문학 관련 잡지를 고루 탐독해야 하고, 잡지에 발표된 시를 선별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를 타이핑하여 올려야 하는 고된 노정이 요구됩니다. 그 결과 1인 미디어 역할을 넘어서서 시의 대중화를 실천하고 계신 데요. 이러한 고된 작업을 요하는 카페 운영 동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카페에 소개하는 시를 선별하는 작업과정 역시 궁금합니다.
강: 〈푸른 시의 방〉 카페를 2002년 3월에 시작했습니다. 벌써 12년째입니다. 제 딴에는 열린 관점을 토대로 좋은 작품들을 열심히 올리고 있어요. 하루에 평균적으로 2, 3백 명이 카페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 잡지 판매에 영향을 준다는 의견도 있어서, 월간지는 잡지 발간 후 한 달이 지난 뒤에 작품을 소개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물론 계간지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카페를 만들었던 처음 의도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체계적인 우리 현대시사 익히기를 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선별하여 소개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물론 카페에 방문자 수가 많고 시인들 역시 방문이 잦다 보니 제 의도와 달리 문단의 권력화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긴 합니다만. 제 의도는 언제나 좋은 작품들을 다수와 함께 향유하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하나의 시 경향이나 시류에 편승하거나 국한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열린 안목으로 신중하게 작품을 소개하곤 합니다. 잘 아는 지인의 작품이 신작으로 발표되었다고 해서 카페에 작품을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제 나름의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작품을 선별하곤 합니다.
그리고 신간 시집을 소개할 때도 원칙이 있는데요. 보통 한 시집에서 3편을 기준으로 아주 많게는 5편 정도 골라서 카페에 소개하곤 합니다. 그리고 5편을 올리는 경우에도 한꺼번에 올리지는 않고 2회 정도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물론 내게 보내오는 시집들 중엔 단 한 편도 소개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요.
서: 1인 미디어가 갖는 매력과 더불어 카페 운영의 어려움 또한 많으리라 생각해봅니다. 1인 미디어 소비행태 또한 기존의 일방향적인 미디어와는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카페를 찾는 유저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매력으로 꼽을 수 있는 반면에 직접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여타의 문학 관련 잡지가 생산한 텍스트를 리뷰한다는 점에서 1인 미디어 운영의 한계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저작권과 관련한 점에서는 예민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요.
강: 저작권을 따지는 계기는 그게 돈벌이가 가능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를 써서 돈벌이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래전 내가 쓴 노래 가사는 저작권을 양도하면서 편당 3백만 원씩 두 건을 팔아본 적 있습니다만, 시는 어림없는 얘기지요. 시작품의 경우 상업적 음반의 노래와는 경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시집을 팔아 부를 누린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시집이 많이 판매되기보다는 더 많은 독자가 시를 읽고 공감한다면 그게 시인의 가장 소중한 기쁨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좋은 시 소개와 좋은 시에 관한 각종 비평 에세이 등의 글을 소개하는데 내 카페의 존재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서: 카페를 통해 실현하시고 싶은 점이 있으시다면요?
강: 현재 카페를 운영하는 지침은, 한 달에 최소한 오륙십 편 정도의 좋은 작품들을 선별하여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려 도전하는 후배 문학청년들에게 올바른 시, 참다운 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60년 가까운 전통의 월간 《현대문학》에서 어떤 달엔 단 한 편도 좋은 시로 건질 게 없을 때도 있고, 계간 시지에서 좋은 시를 보통 두 편 내지 네 편쯤 고를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제가 받아보는 월간 시지, 계간 시지가 대충 30종 내외가 됩니다. 시인도 많고 발표되는 시도 많은데 정작 시가 읽히지 않는 게 안타까운 우리 시단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에 시인이 2만 명이라 합니다. 공인된 권위 있는 등단 과정을 거치고서도 3년이 경과해야 신입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한국시인협회 회원이 재작년에 1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숱한 시인들이 수많은 잡지와 시집 등을 통해, 한 계절에 수천 편 발표하는 요즘같이 어지러운 시의 난바다에서 그야말로 옥석을 가려 시를 쓰려는 후학들에게 좋은 시가 무엇인지 똑바로 가리키는 나침반의 구실을 하는 것은 경륜을 지닌 선배시인으로서 마땅히 떠맡아야 할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서: 날마다 시를 직접 타이핑 하여 카페에 소개하시는 경우에, 잡지에서 시를 읽는 것과 타이핑을 하면서 작품을 재감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날 것 같아요. 저도 습작기 때 필사를 자주 하였고 지금도 가끔 필사하곤 합니다.
강: 저도 직접 시를 타이핑합니다. 시를 타이핑하다 보면 시가 가슴으로 깊이 와 닿는 체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로 읽을 때 좋은 시라 생각된 시가 필사하는 과정에서 좋은 시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도 있어서 소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두세 편의 시를 쉬지 않고 선별하여 카페에 소개합니다. 멀리 외국으로 여행을 갈 때도 미리 시를 준비해서 떠납니다. 카페에 저만 사용하는 코너를 마련하여 시를 미리 올려놓고 그날그날 차례대로 새롭고 좋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세 편씩 일 년에 시를 천 편 정도 올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 작업을 12년 동안 해왔습니다. 그리고 시뿐만 아니라 시와 비평 등의 코너에 다른 시인들이 진행하는 산문이나 비평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좋은 시, 나쁜 시, 가짜 시
서: 선생님의 시에 대한 열정이 놀라울 뿐입니다. 늘 시와 함께하는 삶을 사시는군요. 선생님께서 시를 써오신 지 47년이 되셨는데요. 오랜 기간 동안 시를 써오시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시 혹은 좋은 시가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를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강: 시는 시인의 천성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지 억지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의도적으로 제작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연의 힘 혹은 영감에 의하여 창작된다고 봅니다. 저도 몸이나 마음에서 시가 익었을 때 비로소 시를 쓰는 편입니다. 시집 제작 의도에 맞추어서 기획으로 시집을 만들기 위한 시를 써내는 행위는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시인 자신도 모르고 쓰는 시가 상당수 발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시 창작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제가 47년 이상 시를 공부하고 쓰는 입장인데 요즘 잡지에 발표되는 시를 읽다보면 여러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에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런 시는 나쁜 시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오늘, 아직도 소월 시나 고독과 사랑을 상품으로 포장한 감상적인 시가 나쁜 시겠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점은 가짜 시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소설이건 시건 일단 기본은 ‘문장’에서 출발합니다. 그 가장 기본인 문장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 언어도단뿐의 문자의 배열을 시라 할 순 없습니다. 요즘 극소수 뻔뻔한 시인들 중 문장도 아닌 문자의 배열들을 조합한 언어도단을 가지고 마치 시가 지니는 애매성의 미학을 표방하는 듯 발표하는 걸 더러 봅니다. 그건 감상적인 수준 낮은 시— 나쁜 시도 아니에요. 문장으로 성립하지 못하는 그건 아예 시가 아닌, 가짜 시인 것이지요. 사기 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가 한국시인협회 회보에 발표했던 글 중에 저의 소박한 시론을 대신해줄 구절이 있어 다시 써봅니다. “시인은 정년이 없습니다. 나는 진정한 '젊은'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재기발랄한 젊은 시인의 시집도 사서 열심히 읽어보고, 좋은 시는 날마다 내 손으로 직접 베껴 써보기도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젊은' 시인은 시집이나 문예지를 열심히 사 읽는 이이고, 시인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이는 시집이건 문예지건 잘 사 읽지 않는 이입니다.” 우리 모두 늘 시정신이 젊은 시인이 되도록 늘 시와 함께 길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서: 선생님의 시 세계에 대하여 좀 더 심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지면의 한계로 여기서 마쳐야 할 듯싶습니다. 늘 좋은 시 많이 보여주시고 건강하세요. 긴 시간 대담에 응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강: 안나 시인, 변변치 않은 선배의 시들을 찾아 읽느라고, 바쁜 사람의 귀한 시간을 빼앗게 돼서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이 추운 날 고생스런 대담을 진행하느라고 수고했어요. 그리고 곧 나오게 될 안나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 듬뿍 받게 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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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1965년 제주 출생. 1990년《문학과 비평》등단.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시집『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 동시집『엄마는 외계인』,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