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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부르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날마다 생존을 바다에 맡겨야 하는, 어쩌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아가기에는 힘든 여건 속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주저 없이 그물을 버리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예수님의 복음에 응답하고자 했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극적인 반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지만 그를 이끈 평생의 신념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라는 확신이었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쉬는 교우들의 냉담 이유의 첫째는 먹고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직업과 노동 여건상 성당에 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어떤 이는 성당에 나가도 사제나 수도자, 신자들의 모습 속에 실망만 늘어나 차라리 혼자 믿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를 홀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는, 나와 함께 산 이들이 나로 말미암아 얼마나 행복했는지로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제자들과 같이 특별한 소명을 가진 이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나를 위로하고 곁에 있어 줄 이웃을 찾기 전에, 내가 누구를 위로하며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 곁에 누가 있습니까? 그들을 낚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담 너머 옆집에 성인(聖人)이 계십니다! 저희 살레시오 가족 안에서 오랜 세월 끊이지 않고 전해내려오는 좋은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해가 바뀔 때 마다 총장 신부님께서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한해를 살아갈 생활 지표를 선물로 보내주십니다. 라틴어로 ‘스트렌나’(strenna)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세뱃돈입니다. 생활 지표를 건네받을 때 마다, 세뱃돈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전례력으로 한해가 끝나가는 즈음, 총장님께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생활지표를 보내주셨는데, 제목이 ‘여러분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습니다.’입니다. 이번 생활지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와 노선이 정확히 일치됩니다. 돈보스코 시절부터 저희 살레시오회는 교황님께 대한 극진한 효심으로 유명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교황님의 부탁은 제게 있어 명령입니다.’라고 외치며,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교황님께 힘이 되어드리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 날까지 계속됩니다. 교황님의 요청이라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기쁘게 파견됩니다. 특히 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위험해서 다들 가기 꺼려하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다보니 현재 전 세계 135개국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의 편지 역시 언제나 교황님의 권고나 노선에 적극으로 호응하고 일치됩니다. 교황님의 의중을 살레시안적으로 재해석한 후, 청소년들과 서민들에게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살아 생전 돈보스코는 틈만 나면 오라토리오 안에서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청소년들을 성덕의 길로 초대했습니다. 1884년 5월 10일 돈보스코는 로마에 가셨다가, 그새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있는 청소년들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은 나머지 편지를 한통 쓰셨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1888년 1월 31일 돈보스코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청소년들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꼭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아이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있던 돈보스코였으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앞다투어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중 돈보스코의 애제자 도미니코 사비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안에서 성인(聖人)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느낍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해서 거듭 빙점을 찍으시는 강조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성덕의 길이 어렵지 않고 쉽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은 나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덕은 가깝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담 너머 옆집 이웃들 가운데 성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 영적인 삶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소심하거나 침울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잔뜩 쓰거나 울적하지 않습니다. 거룩할수록 더 인간적입니다. 거룩할수록 더 기쁘고, 탁월한 유머 감각을 지닙니다. 물론 성덕의 여정에서 고통과 십자가는 필수요 기본 양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은 한 인간을 활짝 꽃피어나게 만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안드레아 사도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오늘 우리 모두를 성인이 되라고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오 복음 4장 19절) 뿐만 아니라 성경은 틈만 나면 우리를 성화의 길로 초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나는 주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1장 44절) 성화의 길은 사제나 수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 전체를 위한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그리고 저희 총장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어려운 길이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인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성인으로 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애정을 가로막는 사랑의 바리케이드>
오늘은 ‘엑스(X)’ 모양의 십자가에 순교한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있는 며칠 동안에도 계속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이탈리아 아말피라는 아름다운 해변 마을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그래야 누군가 그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라고 말하며 이 구원을 위한 파견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하지만 ‘파견’된다는 말 안에는 또 누군가와의 이별을 전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주님의 파견을 받는 사도들은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씀대로 자신의 꿈과 애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버림이 결국은 참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버리지 못하여 주님의 뜻을 져버리면 그 애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보좌 때에 어머니가 성당에 너무 자주 오셔서 오시지 말라고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제가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원망을 받는 것보다 그때 그렇게 한 것이 지금도 잘 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반드시 지니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도구임도 잘 압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이 방어벽이 무너질 때 하느님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맺으려고 하던 관계도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두 자녀에게 이 바리케이드를 쳐야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비장이 부풀어 방에만 누워있어야 했던 신앙인이자 의사,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그는 그의 책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에서 자녀들을 안을 수 없고, 자녀들이 그를 안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벽을 치며 살아야했던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는 의사로서 방사능을 연구하고 있었고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방사능을 많이 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업무 과중으로 백혈병에 걸려 길어야 3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다카시는 자신보다 먼저 간 아내의 검게 타 버린 뼈를 양동이로 주워 모아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방사선 연구가인 다카시는 자신이 직접 아내가 죽은 자리에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방사능이 금방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내려 했습니다. 다카시는 방사능에 노출된 곳에 살려면 적어도 75년이 걸린다는 연구결과를 뒤엎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나가사키를 재건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자녀와 함께 작은 단칸방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몸은 뼈만 남은 데다 배는 만삭인 여인처럼 불러있었습니다. 비장이 부풀어있었기 때문이고 그 비장은 작은 충격에도 터질 수 있어 아이들의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그 한 평 남짓한 방에서 아빠 냄새를 맡으며 “아... 아빠 냄새...”라고 좋아합니다. 엄마 냄새도 못 맡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다카시는 그들과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자신을 안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자신에게 넘어지지 않도록 책과 약병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불 속의 아빠 냄새만 맡고 아빠가 잠들어있을 때는 몰래 바리케이드를 넘어와 얼굴을 대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이의 촉감을 더 느끼고 싶으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심경을 다카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비장이 터진들 그게 무슨 대수랴. 이 아이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내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뻐해 준다면 ...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한 달이라도,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이 아이가 고아가 되는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1분, 1초라도 죽을 때를 늦춰서 이 아이가 견뎌야 할 외로운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어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칭찬받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렇게 애정까지도 끊을 수 있는 희생 때문입니다. 그 덕에 하느님의 눈에도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이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는 나가이 다카시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나를 찾아올 ‘죽음’ 역시 한없는 사랑이신 신이 내게 내리는 최대의 사랑의 선물이리라. 그러므로 죽음 전에 겪어야 하는 마음의 고뇌도 몸의 고통도 신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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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안드레아(Andrew)
신분 : 사도,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
같은이름 :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어부 요한의 아들인 시몬 베드로(Simon Petrus, 6월 29일)의 형제인 사도 안드레아(Andreas)는 공관복음에 의하면 가파르나움 출신이고(마르 1,21-310, 요한 복음에 의하면 갈릴래아 베싸이다 출신으로(요한 1,44) 그 역시 어부였다. 그는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제자가 되었다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주님을 만났고, 이때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첫 제자 된 후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얼마동안 그들은 간헐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주님이 갈릴래아로 되돌아 오셨을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시면서 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게 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스키티아(Scythia)와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갔고, 조금은 의심스럽지만 비잔티움(Byzantium,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서 성 스타키스(Stachis, 10월 31일)를 그곳의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나 가장 오래된 초기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 아카이아(Achaia)의 파트라이(Patrai)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4세기경의 문헌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고 하나, 중세 말에 덧붙여진 이야기로는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안드레아 사도가 러시아의 수호성인인데, 이것은 그가 러시아에서 설교했다는 미확인 전승에 따른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의 유해 일부가 4세기경에 그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것은 안드레아 사도 유해 관리자였던 성 레굴루스(Regulus, 3월 30일)의 꿈에서 지시된 것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성 레굴루스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성 안드레아가 부르는 곳으로 갔고, 30여 년 동안 그 지역에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성 안드레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는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성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에 대해서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콘스탄티노플에 있다가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지시에 따라 그리스의 파트라이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1208년에 이탈리아 아말피(Amalfi)의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겨졌고, 15세기에는 그의 두개골이 로마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96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가 그리스 정교회와 이룬 화해의 표시로 그의 유해를 다시 파트라이로 보냈다.
주여 ,
지존하신 당신께
간절히 청하오니,
일찍이 성 안드레아 사도가
당신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렸음같이,
이제는 당신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전구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