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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묵상글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베네딕토의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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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부 베네딕도의 대축일입니다. ‘베네딕도’(Benedictus)라는 이름의 말뜻은 “좋게 말한다.”, “복 받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편>에서 말합니다.
“베네딕도는 은총과 이름으로 복 받은 분이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시 12,2).
이는 단지 복을 주리라는 것을 넘어서, “네 자신이 복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부 성 베네딕도께도 해당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의 후손인 우리도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은총으로도 복이 되고, 이름으로도 복 받은” 삶은 어떤 삶,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우선 형제들에게 좋게 말하는 것, 형제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입에 항상 찬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시편 33,1)라고 노래한 <시편>작가처럼,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고, 형제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베네딕도께서는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라.”(머리말 30)고 하시고, 72장에서는 형제들 간에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72,4)고 하십니다. 곧 ‘복받은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베규 31,19)이라 명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 이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베네딕도께서는 그냥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을 위한 집’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림”(Economia)라는 말은 아주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집’을 뜻하는 말(oikos)와 규율을 뜻하는 말(nomos)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살림살이”, 혹은 줄여서 “살림”이라 표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는 서로를 살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서로를 살리며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살림”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에서 함께 공동으로 드리는 성무일도기도를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저 ‘기도’라 하지 않으시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분과 함께, ‘섬기면서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관심이나 계획, 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거든, 눈을 돌려 바로 그것을 비추고 있는 빛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이 비추인 곳의 어둠을 보기보다, 그 어둠을 비추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빛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머리말 30)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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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부 성 베네딕도 예찬
-유럽의 수호자,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어제부터의 분위기는 웬지 모를 잔치날 분위기처럼 참 흥겹게 느껴졌습니다. 저녁 식탁도 꽉 찼습니다. 무려 머물고 있는 손님이 6명, 전체의 1/3이니 정주수도원의 환대 영성이 빛납니다. 바로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이자 서방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이 흥겨운 잔치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중세초기 암흑시대에 성 베네딕도가 없었다면 유럽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세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성 베네딕도는 유럽을 구원한 은인이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64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이어 1980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도를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와 더불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습니다.
2008년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베네딕도 성인은 자신의 삶과 업적을 통해 유럽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이 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이어진 역사의 어두운 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감격에 벅차 고백했습니다. 한 성인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한지요!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가 성인의 위대함을 웅변합니다. 저녁기도 성경 소구가 성인의 모습을, 계응송이 베네딕도 규칙의 위대함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50,5-7)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성 베네딕도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 자랑은 결국 하느님 자랑이라 기분이 참 유쾌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성은 저를 산과 강의 영성이라 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의 영성이라 정의하고 이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수도명을 지닌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산,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강”이라 자칭 일컫기도 합니다. 저는 외로움을, 스승의 부재를 전혀 느껴본적이 없습니다. 주님께 인도하는 위대한 멘토이자 스승을 세분이나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 요셉,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코 이 세 성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저와 영원히 함께 하는 수호성인들입니다. 전임 고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시공을 초월한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자 멘토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라 고백했습니다. 산과 강으로 요약되는 성 베네딕도의 삶은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제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성 베네딕도를 닮아 죽는 그날까지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추종입니다.
바로 복음이 답을 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수호성인들의 인도에 따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이 우리에겐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베드로의 생각이 참 짧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일편단심, 오매불망 사모하는 주님을 따르는 자체가 더할나위없는 축복이요 행복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상한 예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귀향의 여정,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 초지일관 한결같이, 끊임없이 겸손히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도 주님 따르는 기쁨을 한껏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 따르는 이들, 아버지요 스승인 성 베네딕도
찬란하게 빛나는 이날 기리며, 노래 불러라.
스쳐가는 세속의 행락등지고, 주님 찾는 보람을 한껏 누리며
천사들과 한노래 부르는 영복, 끝이 없어라.”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으로 따를 때 사랑의 은총 선물입니다. 사랑의 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이 있어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들은 바로 사랑의 기적들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온통 사랑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6.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7.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지는 끈입니다. 8.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9.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두가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엔 역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이 되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깊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사랑과 지혜가 결정체를 이룬 성 베네딕도입니다. 분별력의 지혜, 중용의 지혜는 바로 모두를 살리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제1독서 잠언 말씀이 감로수같습니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한다면,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을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의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敬天愛人의 사람이 되어 가면서 주님을 닮아갈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을, 성 베네딕도를 닮고 싶습니까?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사람, 사랑의 사람, 지혜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추종과 사랑과 지혜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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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일꾼이 적다.
늘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주님과 바리사이를 비교하면 다른 관점에서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관점인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할 일이 많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어제도 한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큰 병원의 내과 과장이시고 그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을 모아
봉사회를 꾸려가시는 분인데 우리 협동조합 산하에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하려고 몇 번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나 코로나와 다른 이유로 인해 추진을 중단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나아졌으니 이제 시작함이 좋지 않겠냐고 먼저 제의해오신 겁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너무 감탄스러운 것은 어찌 그리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으시고,
코로나 시국을 지내며 당신 본업만도 너무 많아 다른 것은 생각조차 어려울 텐데
이것저것 봉사할 궁리를 그렇게 하시는지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이분처럼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성향 차이가 아니라 사랑 차이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할 일이 늘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잘못된 말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가만 보고 자기 밖의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만 빠져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보다 그의 죄와 잘못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만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늘 죄와 잘못을 지적당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기보다는 죄인으로 기가 꺾여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교만한 바리사이들 밑에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을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여운 군중 그러니까 가여운 많은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위한 일 또한 많음을 보시며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주님의 이러한 토로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아니, 지금 더 많이 토로하십니다.
지금 많은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자의 부족을 토로하고,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위한 일꾼,
영어교실을 위한 영어 선생님(회화가 가능한),
심리 상담 봉사자, 요리 봉사자, 단순 봉사자 등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사랑은 사랑을 실천할 때 성장하는 것이니 용기 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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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꾼다운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성령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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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가 맞는 말 같은데 우리라는 말을 자주하니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우리는 고려, 조선으로 왕조는 바뀌었지만 거의 1,500년가량 한 국가의 통치 체제에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입은 1,000번 이상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외세의 침입에는 똘똘 뭉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에는 친밀함이 있고, 동질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사말에는 ‘밥은 먹었는지요?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는 인사말입니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주변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나의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면 일본 사람은 아이 엄마를 째려보고 아이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음 역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울면 사람들이 가서 아이를 달래 주려고 하고, 아이 엄마가 다음 역에서 내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있어서입니다. 식당에서도 일하는 분을 ‘이모’라고 부르고, 친구의 엄마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가족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곱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께 선택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당대의 많은 나라는 ‘여러 신’을 섬겼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섬겼습니다. ‘유일 신’을 믿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약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과 함께 성경은 21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한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삶의 이정표로 삼는 경우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리고 딸을 고쳐 달라는 이방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자 이방인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먹습니다.” 이스라엘은 서양문화의 원류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신약의 뿌리였으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와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교회는 100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버렸고, 벼슬을 포기했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용감하게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7000킬로를 걸었습니다.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복녀 강완숙 골롬바는 목숨을 걸고 사제를 보호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박해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이 정말 작은 이유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같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쉽지만 의미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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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 말씀에 한창이나 머물렀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단순한 사제나 수도자 성소, 혹은 그러한 직무를 가진 교회의 일꾼을 청하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머무르고 또 머무르다 보니 위의 말씀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수확할 것.’은 하느님과 관련된 모든 것일 것입니다. 즉 사랑과 자비와 기도와 봉헌 등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수확할 일꾼은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일 것입니다. 즉, 사랑을 실천하고 봉헌하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비단 성직자나 수도자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꾼’은 우리 모두입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가 도와야 합니다. 우리 서로가 수확하고 수확을 도와야 합니다. 누군가가 달려와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베네딕도 성인의 축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기도하고 일하라 ’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아는 그 기도가 맞습니다. 그런데 ‘일하라’라는 말은 이제 저에게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일하라’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하느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그 손을 빌려주라는 말로 들립니다. 수확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수확에 참여하기를 오늘 하루 기도합니다.
감기약 한 알
감기 기운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주섬주섬
약통에 약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똑딱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습니다.
한 알로 충분합니다.
다른 것은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감기약은 한 알로 충분합니다.
감기약처럼
한 번의 기도가
한 번의 눈물이
우리의 치유는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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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에 읽었던 ‘수도자처럼 생각하기’(제이 셰티)에서 읽었던 문장을 소개합니다.
“건강한 습관은 처음엔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진다. 건강하지 않은 습관은 처음엔 하고 싶지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저를 ‘새벽형 인간’으로 부릅니다. 워낙 새벽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신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누구보다 늦게 일어났었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저에 대해 사람들에게 ‘올빼미형 인간’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항상 늦게 일어나는 저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저의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즉, 새벽에 일어나기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어떠했을까요? 하루 종일 피곤해서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결국 기분 나빠지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운동 안 하기, 기도 안 하기, 책 안 읽기, 텔레비전 보기, 인스턴트 음식 먹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보기…. 이렇게 하길 바라고 또 쉽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점점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하기 싫은 것도 있습니다. 운동하기, 기도하기, 봉사나 희생 실천하기, 독서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하기 싫은 것이기에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집니다.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진정한 행복을 위해 처음에는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지는 건강한 습관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귀를 쫓아내자,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모함합니다. 이 모함은 계속되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모함을 멈추기 위해 그들에게 강력한 벌을 내려 어리석음을 꾸짖으면 안 되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사랑만을 전해주십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의 길로 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꾼이 필요하다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일꾼들이 가득해야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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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생이 짧다고 판단하면서도 마치 인생이 끝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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