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소송
황상순
모름지기 밥은
봄안개 피어오르는 호수를 건너듯
주걱으로 노를 저으며 홋홋이 퍼야 한다
따뜻한 솥밥 한 그릇이면
어두웠던 몸이 환하게 백열전구를 켜는데
전자레인지를 열고 햇반을 꺼내다가
누룽지도 눋지 않는
쓸데없이 그냥 뜨겁기만 한 밥
앗, 뜨거워라
방바닥에 통째로 엎지르고
저것도 나와 마주할 생각이 없구나
손길 마다하는 야박한 뜨거움에
흩어진 밥알 주워 담다가
목구녕이 어찌하여 포도청인가, 억울한 심사에
골목길 지나는 개라도 붙잡아 앉혀놓고
송사를 벌려볼 작심을 해보는 것이다
--2023년 {시터} 동인 시집에서
프랑스의 파리와 이탈리아의 로마, 독일의 베를린이나 스위스의 제네바 등, 오늘날의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럽의 도시들마저도 이제는 곧 폐허로 변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사회이며, 모든 인간의 공동체 사회를 다 파괴시켰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공동체도 파괴시켰고, 유교적인 가정과 그 옛날의 농촌공동체도 파괴시켰으며, 무리를 짓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그 모든 위계 질서도 파괴시켰다.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구와 동료, 이웃과 이웃의 관계도 다 파괴시켰으며, 오늘날의 우리 인간들은 뿌리 없는 ‘나홀로족’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탐욕 공동체이며, 나의 이익이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서로 서로 협력하면서도 속지 않으려고 발톱을 세우고, 자기 자신의 사명과 책임에 따라 일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뒷통수를 칠까봐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부모형제지간의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나의 이익이 훼손될까봐 발톱을 세우고, 고향의 선산을 가꾸거나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모두가 다같이 죽기보다도 더 싫어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든 만남과 인간의 관계가 싸움의 형태로 변질된다. 고소- 고발이 일상사가 되었고, 특허소송이든, 상표권 소송이든, 유산상속 소송이든, 끊임없는 소송전이 이 세상의 삶의 축제가 되었다.
대도시의 아파트와 현대식 주택은 우선적으로 교통이 좋아야 하고, 온갖 편의점과 백화점과 모든 문화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최첨단 엘리베이터와 지하주차장과 경비시설들도 다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이 현대식 편리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 옛날의 낡고 오래된 주택이 더없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낡은 건물을 수리해야 하고, 엘리베이터도 없고, 더, 더군다나 주차장조차도 없기 때문에, 제아무리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우리 젊은이들과 ‘나홀로족’에게는 더 이상의 아무런 매력도 없는 주택들에 지나지 않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세계문화유산은 이제 곧, 폐허가 되고,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가 다같이 최첨단 신도시로 몰려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황상순 시인은 그 옛날의 산업사회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고, 유교적이며 가부장적인 공동체 사회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충효사상’을 기초로 하여 ‘가화만사성의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혼자 살며 혼밥을 먹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밥은/ 봄안개 피어오르는 호수를 건너듯/주걱으로 노를 저으며 홋홋이 퍼야 한다.” “따뜻한 솥밥 한 그릇이면/ 어두웠던 몸이 환하게 백열전구를” 켤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따뜻한 솥밥을 함께 먹을 식구가 없는 것이다. 산업사회는 특성상 단산을 해야 하고, 1-2명의 자식들이 출가를 하면 모두가 다같이 ‘나홀로족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옛날의 밥상에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가정의 화목을 다지던 시절은 그야말로 꿈만도 같았던 그 옛날이 되었고, 이제는 마트에서 햇반을 사다가 전자레인지에다 덥혀 먹으면 되는 것이다.
황상순 시인의 [혼밥 소송]은 쓸데 없는 헛발질이며, 지나가는 개에게라도 화풀이를 해야겠다는 우화라고 할 수가 있다. 혼자 살며, 누룽지도 눋지 않는 전자레인지에서 햇반을 꺼내다가 그냥 너무나도 뜨거워 방바닥에 통째로 엎지르는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요컨대 잘못은 자기 자신이 해놓고 그 부주의했음을 자책하기는 커녕, “저것도 나와 마주할 생각이 없구나/ 손길 마다하는 야박한 뜨거움에/ 흩어진 밥알 주워 담다가” 그만 울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말은 배가 고프면 죄를 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따라서 “목구녕이 어찌하여 포도청인가, 억울한 심사에/ 골목길 지나는 개라도 붙잡아 앉혀놓고/ 송사를 벌려볼 작심을 해보는 것이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나홀로족의 분풀이’로 [혼밥 소송]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다.
나 혼자 산다. 참으로 사회적 동물로서의 저주 받은 삶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한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