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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신앙의 삼각대 /데살로니가전서 1:1-10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1fWUrupT4D0
어느 목사님이 뉴욕 맨하탄 34가에 있는 한국 식당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그 식당은 아주 잘 되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음식을 먹어보면 맛이 그냥 그렇답니다. 그런데도 손님이 많은 이유는 소문이 잘 나서 그렇답니다.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이 그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일로 더욱 유명해졌답니다. 식당이 잘 되려면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 소문도 잘 난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2주째 교회에 오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요. 먼 곳에서 이사를 오셨답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 오신 이유는 지인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소개하시면서 말씀이 참 좋다고 하셨답니다. 그렇게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좋은 소문입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중에 현재의 그리스에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을 봤습니다.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주께서 자기를 마게도냐로 부른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마케도냐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먼저 빌립보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루디아를 전도했고, 루디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이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강론하였고,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많은 그리스 사람들과 몇몇 귀부인들에 의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매수하여 바울 일행을 잡아 처단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눈치 챈 바울은 몸을 숨겼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피신시켰습니다. 그 이후 바울은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내어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하게 했습니다.
6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를 본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바울에게 칭찬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삼각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메라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의 다리가 아무리 적어도 세 개는 있어야 합니다. 다리 두 개로는 카메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네 개이면 더 안정적이겠고 그 이상이 되어도 카메라는 안정적일 것입니다. 카메라의 다리는 아무리 적어도 세 개는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세워지려면 최소한 신앙의 삼각대가 필요합니다. 다른 조건들을 더 갖추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는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 가장 기초가 되는 삼각대는 무엇일까요?
1. 믿음의 역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기도 응답을 누립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치유도 일어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믿음의 역사가 나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따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히스토리가 아니고 헬라어로는 ‘ἔργον(에르곤)’이라고 하는데 ‘일, 행위’를 말합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요 6:29에서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역사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구원의 역사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②기쁨의 역사입니다. 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희락의 영이십니다. 성령충만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으로 성령충만했고, 성령충만하니 환난 중에서도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워싱턴 대학의 멜초프(Andrew Meltzoff)와 무어(Keith Moore) 박사는 태어난지 이틀 미만의 신생아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아기들을 신생아실 옆 작은 방에 있게 하고, 실험자가 아기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20초를 주기로 아기에게 혀를 내밀기와 고개 흔들며 도리질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실험은 이 행동에 대한 아기들의 반응을 관찰하며 8분 동안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실험자가 도리질을 할 때 아기들 역시 도리질을 더 많이 하고, 실험자가 혀를 내밀 때 아기들도 더 많이 혀를 내밀었습니다. 신생아들은 실험자의 행동을 모델로 삼고 따라한 것입니다. 이 실험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유사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모방본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모방하느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됩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모방하게 되느냐입니다. 특히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내주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예수님을 모방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기쁨의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슬프고 우울한 분들, 마음의 상처로 괴로운 분들, 내면의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서 폭발하는 분들은 성령충만을 받으시고 성령님으로 인하여 기쁨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③행함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이 되기는 쉬우나 그것답게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목사가 되기는 쉽습니다. 신학의 과정을 거치고 목사고시에 합격하면 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목사다운 목사로 사는 것은 평생의 과제입니다. 교인이 되기는 쉽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에 등록하면 누구나 교인이 됩니다. 그러나 참 교인답게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11월까지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 임직식이 있을 것입니다. 임직은 쉽습니다. 그러나 임직자답게 사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던 어떤 분이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좌천이었습니다. 복잡한 서울 본사와는 달리 일산에 있는 창고는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작은 오리 사육장을 만들었고, 오리를 키우는 사육장에서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물통 속에서 오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 저리 뒤척여 보았지만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속에 빠져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올 때부터 비실비실하던 오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리 사육장에 가서 오리가 죽은 이유를 따졌습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양계장 주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서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원래 오리는 날개 밑에 기름샘이 있습니다. 오리는 수시로 그 기름을 자기 날개와 털에다 열심히 바릅니다. 그러면 오리가 물속에 들어가도 털이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물위를 떠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리는 물속이 아닌 땅 위에서 주인이 던져주는 사료를 먹고 자랐기에 기름샘에서 나오는 기름을 몸에 바를 필요가 없었고 방수기름을 바를 줄도 몰랐습니다.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물에 뜨지도 못하고,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불쌍한 오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오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요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과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입니다. 믿음을 증거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행함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로만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드러납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됩니다. 마틴 루터는 “타오르는 불꽃에서 열과 빛을 분리할 수 없듯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실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소문은 각처에 퍼졌습니다. 행함의 결과였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함이 소문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행함의 비결은 말씀에 대한 좋은 태도입니다. 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도와 주님을 본받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살전 2;13은 그들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바울의 설교를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믿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무신론자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출석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성경을 대하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이렇게 익숙하게 종교적 환경에 접했었는데, 나는 설교를 수없이 많이 들었는데, 어쩌면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존 번연은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3장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고 사람의 마음은 밭인데, 그는 마귀가 자기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간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만약 마귀가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영적인 맹인의 상태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나의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나 자신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속았던 세월을 생각하니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는 설교를 듣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결과 그는 참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여정을 보여주는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진지해야 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 사랑의 수고
사랑하면 자기에게 유익입니다. 미국의 예방의학의 권위자인 피터 핸슨은 건강에 관한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건강 방법은 첫째, 적당한 음식을 섭취하라. 둘째, 적당한 운동을 하라. 셋째, 좋은 습관은 갖고, 나쁜 습관은 버리라. 넷째 사랑하며 살라. 피터 핸슨은 앞의 세 가지는 건강 비결의 50%고 나머지 50%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3절에 보면 사랑의 수고가 나옵니다. ‘사랑의 수고’는 영로로 ‘labor of love’입니다. ‘labor’라는 단어는 ‘수고’ ‘노동’이란 뜻과 함께 아기를 낳을 때 겪는 산모의 ‘산고’와 ‘진통’이란 뜻도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엄마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기를 때 겪는 ‘산고’와 ‘진통’과 같은 ‘수고’가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엄마는 자녀를 위하여 산고도 진통도 아끼지 않고 심지어 목숨도 줄 수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교통사고로 두 눈을 잃었습니다. 이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기증할 사람이 나타나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드디어 청년은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환하게 보이니 감격스러웠습니다. 비록 한쪽 눈이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뻐하던 그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병상을 떠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어머니의 한쪽 눈에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자기 눈 하나를 준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자기 눈을 준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만든 행동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33년 간 고난의 세월을 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반드시 믿음이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교회와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사랑의 수고해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자신은 성경대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붙잡았던 성경 말씀은 마 6:26이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새도 먹이시는데 나를 굶기시랴?’라는 확신을 갖고 일하지 않고 놀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곧 가난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에게 따졌습니다. “목사님! 성경은 믿을 수 없네요. 하나님은 새도 먹이신다고 하셨고 저는 그 믿음으로 살았는데, 가난뱅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성경은 진리입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님! 주님은 어떤 새를 보라고 하셨나요? 공중의 새입니다. 그런데 형제는 먹을 것을 얻으려고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공중의 새를 보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는 새만 보았네요. 형제는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하나님은 공중 나는 새처럼 수고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시지 나뭇가지 위에서 놀고 있는 새처럼 수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열매를 주시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 1:24에서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웠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시간을 내야 합니다. 몸과 물질도 아끼지 않고 수고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되 특히 전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고 장광영목사님이 금호제일교회 담임을 하시며 복음병원의 이사와 원목실장으로 섬기실 때였습니다. 목사님이 주일 낮 예배 후에 병원에 가서 기도를 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전도하는 어린이들을 만났습니다. 전도하러 나온 아이들이 목사님을 보고는 “선생님,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하고 전도를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너희들 어느 교회에 다니니?”, “금호제일교회입니다.”, “너희는 너희 교회 목사님을 아니?”, “잘 알지요. 우리 목사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누구시냐?”, “장자, 광자, 영자 목사님입니다.”, “내가 장광영 목사란다.” 아이들은 “어쩐지 닮았어요.”라고 하더니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축복기도를 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힘껏 축복기도를 해주셨답니다.
울산교회 정근두목사님이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아주 잘 요약하셨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요약하신 내용을 제가 더 압축해보겠습니다. 모든 교회는 뭔가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무엇인지 그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우린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해왔다”고 말한다면 그 교회는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그 다음은 인물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리더가 무엇을 원하는가?”입니다. 그 다음은 재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돈이 얼마나 들까?”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그 외에도 릭 워렌 목사님은 몇 가지 흔한 유형을 소개합니다. 프로그램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 건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행사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구도자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 등을 열거하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적 패러다임은 교회의 본래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추진력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불변하는 교회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에 에너지를 쏟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수고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수고를 해야겠습니다.
3.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는 장점이 많았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박해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았으니 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대처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내부적인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잘못 해석된 종말론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재림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전후에 나온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살전 4:15-18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장차 주님은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믿다가 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이고, 그 후에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들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위로는 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하며 상당히 혼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후 2:3,4에 보면 재림 직전에 일어날 징조를 말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하며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재림 직전에 있을 몇 가지 징조를 말하여 지금은 일할 때라고 가르쳐주었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먼저 대대적인 배교가 일어날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집단적인 배교입니다. 그 서막이 지금 우리 시대에 열리고 있습니다. 종교통합을 추진하는 WCC와 그 뒤를 따라가는 로잔대회입니다. 종교통합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멸망의 아들이고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를 통합하고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경배하게 할 것입니다.
이때는 환난의 때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과한 후에 공중으로 들림 받아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의 지상 재림으로 적그리스도는 멸망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우리의 소망은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재림의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환난이 와도 인내하게 됩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ὑπομονή(휘포모네)’입니다. 인내는 견디기는 힘들지만, 지고 있는 무거운 짐 아래에서 참고 견디어 낸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는 재림의 소망 때문에 “마라나타”였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런데 오늘 일부 한국교회 신자들의 인사는 “부자 되세요. 복 받으세요. 건강하세요.”가 되었습니다. 축복이 소망입니다.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고, 주님의 재림이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이 와도 고난이 와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믿음 좋은 권사님이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건강이 안 좋게 느껴져 병원에 갔다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그 날부터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용서 받고, 편지 쓸 사람에게는 편지를 썼습니다. 빚진 것은 다 갚았고, 지키지 못한 약속도 다 정리했습니다. 유산도 정리하고, 교회에 헌금도 하고, 선교비도 보냈고, 유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병세가 나빠지는 증상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오진이랍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권사님, 지금까지 인생 정리하시느라 돈도 많이 썼는데 후회 되지 않으세요?” 권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제가 지난 몇 달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산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이요 재림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마귀가 주인노릇하기 때문에 희한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고난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하고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의 경전 미드라쉬 (Midrash)에 ‘다윗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렀습니다. “나를 위해 반지를 만들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시련에 처할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그 반지에 새기어라.” 세공사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멋진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말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시련에 처할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의미가 있는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찾아가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받는 은혜도 있지만 믿음으로 살기에 당해야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축복도 지나갈 것이기에 너무 연언하지 마시고, 고난도 지나갈 것이기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삼각대’라는 제목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세 기둥을 살펴봤습니다. 1.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구원과 기쁨과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2. 사랑의 수고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수고를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그 수고는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3. 소망의 인내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재림으로 인한 소망입니다. 고난도 축복도 다 지나갑니다. 결국 우리는 부활하시는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