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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Ⅷ -근·현대 한국화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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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회화, ▣ 전적, ▣ 금속·공예, ▣ 조각, ▣ 토기·도자.
『이건희 컬렉션 Ⅱ-근현대한국화①』 https://blog.naver.com/ohyh45/222500896165
▣ 허백련, ▣ 김은호, ▣ 이상범, ▣ 변관식, ▣ 이응노, ▣ 김기창, ▣ 박래현, ▣ 이도형,
『이건희 컬렉션 Ⅲ-근현대한국화②』 https://blog.naver.com/ohyh45/222499693504
▣ 백남순, ▣ 나혜석, ▣ 김종태, ▣ 서동진, ▣ 이종우, ▣ 김중현, ▣ 박상옥, ▣ 김종영, ▣ 권진규, ▣ 윤효중,
『이건희 컬렉션 Ⅳ-근현대한국화③』 ▣박수근, ▣김환기 https://blog.naver.com/ohyh45/222500896165
『이건희 컬렉션 Ⅴ-근현대한국화④』 https://blog.naver.com/ohyh45/222500899707
▣ 이성자, ▣ 이대원, ▣ 권옥연, ▣ 박생광, ▣ 도봉상, ▣ 박영선, ▣ 서진달, ▣ 남 관, ▣ 김 경,
『이건희 컬렉션 Ⅵ-근현대한국화⑤』 https://blog.naver.com/ohyh45/22250249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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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Ⅶ-근현대한국화⑥』 https://blog.naver.com/ohyh45/222502563094
▣ 이중섭, ▣ 이인성, ▣ 이쾌대, ▣채용신,
『이건희 컬렉션 Ⅷ-근현대한국화⑦』 https://blog.naver.com/ohyh45/222503421442
▣ 유영국, ▣ 문학진, ▣ 변종하, ▣ 서진달, ▣ 박항섭, ▣ 문 신, ▣ 박대성, ▣ 임직순, ▣ 신학철,
『이건희 컬렉션 Ⅸ-외국화가작품』 https://blog.naver.com/ohyh45/22250425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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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劉永國, 1916-2002, 울진)
유영국(劉永國)은 1916년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4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울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로 진학, 이곳에서 미술교사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를 만났고, 쿠니오를 통해 미술을 접하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친일 행위에 불복하여 중퇴한 후에 쿠니오의 조언으로 도쿄 문화학원(文化學院) 유화과에 지원, 입학했고,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등과 교류하였다. 1938년 문화학원 미술과를 제11회로 졸업했다. .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했고,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 당대 일본의
영향력있는 추상미술작가와 교유하였다.
1940년에는 오리엔탈사진 실기강습회와 오리엔탈사진학교 과정을 통해 사진을 배웠다. 1943년 중반까지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태평양전쟁의 징후로 인해 1943년 8월경 귀국한 뒤, 부친이 운영하던 고기잡이배를 탔다. 그는 1944년에 김기순과 결혼했다.
유영국은 김환기(金煥基)의 제안으로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50년 사퇴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울진으로 피난하여 양조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1954년에 환도하여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6월경 홍수로 일본에서 제작한 100여점이 넘는 작품이 유실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1955년 양조장일을 완전히 접고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재개하였다. 그는 미술대학 교수활동도 재개했다.
1957년에 홍익대학교 전임강사에 취임하였다가 1958년에 퇴임하였으나, 1966년에 홍익대학교 정교수로 부임하고 서양화과장을 맡았다. 그러나 1970년에 근무일 수가 주 3일에서 6일로 늘어나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전업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유영국은 1977년 심근경색이 발병하였고 치료 후 다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작품 활동
유영국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문화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37년 제7회 ‘독립미술협회전’에 유화 ‘랩소디’를 출품해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입선했고 이듬해 제2회전에서 협회최고상을 받아 회우(會友)로 추대되었다.
이후 유영국은 자유미술가협회와 N.B.G.(Neo Beaux-Arts Group) 양화동인 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등 일본 추상미술가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에는 ‘work(1938/2002년 재제작)’와 같은 릴리프(부조) 작업과 1942년 경주 답사 중의 불상 및 고건축 사진 작업 등 회화 이외의 매체를 탐구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을 통해 유영국의 작품이 소개되었으며,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3년 여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유영국은 1948년 김환기, 이규상(李揆祥)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형이념에 기초한 그룹으로 여겨지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하여 ‘신사실파 창립전’을 통해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국전(國展)’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50년미술협회’도 결성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창립전이 무산되었다. 피난 중에는 부산에서 ‘현대미술작가 초대전’과 제3회 ‘신사실파 부산전’에 출품했다.
1955년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재개하여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전위적인 미술단체를 이끌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휴전 후 유영국은 박고석(朴古石), 이규상, 한묵(韓默), 황염수(黃廉秀) 등과 1956년에 창립한 ‘모던아트협회’와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2‧9 동인회’와 ‘신상회(新象會)’를 결성하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도 출품하는 등 그룹활동을 주로 하였다,
유영국은 1964년 일체의 그룹 활동 중단을 선언한 뒤 같은 해에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개인 작업에 몰두했다.
유영국의 작품세계는 산, 바다, 노을 등의 일상 속 자연의 형태를 선, 면 등으로 단순화시켜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추상화 작업을 특징으로 한다. 형태는 ‘산(1957)’, ‘work(1964)’와 같은 비정형에서 ‘work(1970)’처럼 점차 엄격한 구성의 기하학적 조형을 사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색은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을 기반으로 초록, 보라 등을 통해 변화를 주었으며 같은 계열도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었다. 전반적으로 표면의 질감은 살렸다. 이 같은 유영국의 추상화들은 자연의 정수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다. 기본 조형요소와 강렬한 색채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자연의 추상상태를 형상화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현대의 전위적인 미술운동 그룹들에 리더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60세까지 다양한 조형실험을 하기도 했으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한국 미술계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선과 면과 색을 중심으로 자연이라는 대상을 환원시키려는 작품세계를 고수하여 1960, 70년대에도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을 유지한 것은 외골수적 면모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화백은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avant-garde)'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던 선구자이다. 특히,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이다.
『산』, 1960, oil on canvas, 136 × 211 ㎝, 국립현대미술관
유영국(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중 한명으로 꼽히는 작가로, 한국적 추상의 통념을 벗어나 처음부터 순수한 기하 형태를 조형요소로만 채용해 작업한 작가다.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준령(峻嶺)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는 듯하다. 유영국은 평생 고향인 울진을 연상하며 산과 바다를 그렸다. 김환기와 함께 한국 최초로 추상을 시도했으며 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폭발적으로 그리며 화풍을 정립했다. 1960년 일련의 산 그림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매우 기하학적이면서 구성적인 화면에 원색의 조화를 꾀하는 작품이다. 유영국의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오직 절제된 형태와 강렬한 원색 만으로 작품을 완성해왔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그는 보다 원론적인 회화의 본령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961년 이 작품처럼 그는 산이 아닌 산맥을 마치 산수화처럼 그려낸다.
특히 이 작품의 조감하는 즉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은 마치 계곡의 작은 생명과 기운까지 생동감 넘치게 담아내고 있어 관객들을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그의 화력은 대체로 1945~1950년대,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1970년대 이후로 나뉜다. 이런 구분으로 보자면 그는 이 그림을 제2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유영국(1916-2002)은 ‘산의 작가’, 정확히는 ‘추상화시킨 산의 작가’다. 유학 시절 일본에서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환기(1913-1974)와 함께 활동하며 한국 추상화의 길을 개척했다.
왜 산을 줄기차게 그리느냐고 누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떠난 지 오래된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단면, 다채로운 색….”
그는 산의 형세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시켜 색면으로 구성하고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을 쓴다. 그렇게 추상화시킨 유영국의 산 작품에선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처럼 숭고미가 풍긴다. 그러면서도 첩첩산중 우리 산의 맛이 있다.
한국 산 특유의 깊은 산이 갖는 맛이 있다. 그 산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가 나고 자란 ‘강원도(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북에 편입) 울진’의 산이 그랬다.
이인범 상명대 교수는
“나이프로 층층이 색을 쌓고 다시 뜯어냄으로써 자연의 두께와 깊이를 구축해간다. 산의 색면은 표현주의적인 앵포르멜(물감을 끈적끈적하게 바르는 추상) 양상을 드러내면서도 북송대의 기운생동하는 거벽산수의 기억을 불러낸다”고 평했다.
유영국은 울진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가 경성 제2고보를 다녔다. 졸업을 1년 남겨두고 자퇴해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졸업장이 없어 꿈꾸던 항해사가 될 수 없자 폴 고갱처럼 영혼이 자유로운 화가가 되려고 도쿄 문화학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전위미술의 세례를 받았다. 30년대 일본에서 붓을 버리고 나무판자 조각을 구성해서 붙이는 부조 작업(릴리프)을 그룹전에 발표한 것이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접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결혼한 뒤 선친에게 물려받은 어업을 했다.
미술로 돌아온 것은 김환기 덕분이었다. 47년 김환기로부터 서울대에 신설하는 응용미술과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서울에서 김환기 이규상 등 추상 작가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화가로서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50년 6·25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1·4후퇴 때 고향 울진으로 가족과 피란 온 뒤 생계를 위해 양조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양조장 한구석에 화실을 마련했지만 창작 욕구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55년 마침내 서울로 돌아와 화업을 재개했고 ‘잃어버린 10년’을 보상받으려는 듯 창작욕을 불태웠다. 국전 초대작가로 추천돼도 거부하며 그가 매진한 주제는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추상 작품들이었다.
64년 첫 개인전 이래 2~3년 단위로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는데, 77년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뒤 심장박동기를 달고 사는 처지가 됐어도 98년까지 개인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칭 ‘공부하는 작가’였다. 팔리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작품이 팔린 것은 환갑이 다 된 75년 현대화랑 개인전에서였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야. 육십까지는 연구만 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의 혁신의지는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색채와 형태, 깊이감을 탐구한 흔적은 60∼70년대 절정기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유영국의 작품은 100호 이상 대작이 많고 결코 작품값을 낮게 매기지 않아 한때 가장 작품값이 비싼 작가로 꼽혔다고 한다. 당대 최고 컬렉터들만이 유영국 작품을 소장할 수 있었는데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그중 1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유영국 작품은 유화 20점과 판화 등 187점이다. 대구미술관(5점) 전남도립미술관(2점)에도 작품이 기증됐다. [출처] : 손영옥 문화일보 문화전문기자
유영국 '산', 기하학적 산맥으로 韓 모더니즘 구현
유영국(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중 한명으로 꼽히는 작가로, 한국적 추상의 통념을 벗어나 처음부터 순수한 기하 형태를 조형요소로만 채용해 작업한 작가다.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이 작품은 매우 기하학적이면서 구성적인 화면에 원색의 조화를 꾀하는 작품이다. 유영국의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오직 절제된 형태와 강렬한 원색 만으로 작품을 완성해왔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그는 보다 원론적인 회화의 본령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961년 이 작품처럼 그는 산이 아닌 산맥을 마치 산수화처럼 그려낸다. 특히 이 작품의 조감하는 즉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은 마치 계곡의 작은 생명과 기운까지 생동감 넘치게 담아내고 있어 관객들을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그의 화력은 대체로 1945~1950년대,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1970년대 이후로 나뉜다. 이런 구분으로 보자면 그는 이 그림을 제2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렸다고 볼 수 있다.[백창현 중부일보 기자 ]
유영국의 작품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하였다. 이때 산은 단순히 풍경화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여러 가지 형태와 색채, 질감 등 회화적 요소들을 실험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과업을 부과하듯, 완전히 절대적인 추상의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갔는데, 이 모든 과정은 약 2년에 한 번씩 열었던 개인전을 통해 발표되었다.
각각 1972년과 1974년에 제작된 ‹작품›은 유영국의 회화적 경로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그는 스스로 “60세가 될 때까지는 공부를 하고,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그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완전한 절대 추상에서 점차 자유로운 색감과 형태감으로 변모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영국 작 ‘산’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유영국의 ‘산’, ‘무제’도 산을 소재로 원, 삼각형 등의 기본 조형요소로 환원한 작품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작이다.
유영국의 《산》, 1968.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단일 작가로는 작품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유영국 화가 작품이다
유영국 작품에서 '산'은 정사각 화면을 가로지른 '대각선'이 된다.
산등성이 두 개가 가운데서 교차하고 그 너머에 푸른 하늘과 깊은 바다가 펼쳐진다. 파란색이 점점 짙어진다. 물감을 덧칠해 마치 빨려드는 듯하다.중심으로 선이 정확하게 교차하고 가장자리에는 스미듯 녹색이 변화를 일으킨다.[박규리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중]
유영국 `산`, 1970년대, 53.5 × 73㎝,
유영국, 작품, 1972, oil on canvas,133x133cm. 국립현대미술관
1972년과 1974년에 제작된 『작품』은 유영국의 회화적 경로에 있어서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그는 스스로 "60세가 될 때까지는 공부를 하고 그 이후 부터는 자유롭게 그리겠다" 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완전한 절대 추상에 점차 자유로운 색감와 형태감으로 변모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방형의 화면 위에 한 작품은 차거운 계열의 색체를 다른 한 작품에는 따뜻한 계열의 색체를 과감하게 대별한 가운데, 각각의 작품은 같은 계열의 색체 내에서 미묘한 변주를 더하고 있다.
유영국, 작품, 1974, 캔버스에 유채, 136x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정방형의 화면 위에 한 작품은 차가운 계열의 색채를, 다른 한 작품은 따뜻한 계열의 색채를 과감하게 대별한 가운데, 각각의 작품은 같은 계열의 색채 내에서 미묘한 변주를 더하고 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화가 유영국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유영국의 『산』, 1974, oil on canvas, 대구미술관
유영국, 작품, 1973, oil on canvas, 133 x 133cm, 대구미술관
유영국의 『산』, 1974, oil on canvas, 135 X 135 cm, 대구미술관 제공
유영국, 『산』, 1977, oil on canvas,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소장한 이인성, 이쾌대, 유영국 등 근대화가 8명의 작품 21점을 기증받았다고 28일 밝혔다. 고 이 회장의 기증 작품은 고향인 대구를 배려해 선정된 작품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화가 이인성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을 비롯 동시대 대구가 낳은 또 한 명의 천재화가 이쾌대의 ‘항구’(1960)가 기증된 작품들이다. 역시 대구 출신의 서동진, 서진달, 변종하의 작품과 함께 경북 울진이 고향인 한국 추상화의 거장 유영국의 수작도 포함돼 있다.
기증 작품의 목록을 보면 김종영(1점), 문학진(2점), 변종하(2점), 서동진(1점), 서진달(2점), 유영국(5점), 이인성(7점), 이쾌대(1점) 등 8명의 작품 21점으로 작품 수로는 이인성의 것이 가장 많다.
한국 근대미술의 별과 같은 작가 이인성, 이쾌대를 비롯해 대구의 초기 서양 화단을 형성했던 서동진, 서진달의 수작을 만날 수 있으며, 추상 조각의 거장 김종영, 한국적 추상화의 유영국, 1세대 추상 작가 문학진, 신형상주의의 변종하의 작품 등을 통해 한국미술 전반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