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은 물론 여행도 바꿔 놓았다. 끊임없이 변이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국경이 열리고 닫히고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코로나 이전처럼 맘 편히 해외여행을 다닐 날이 다시 올까 싶다. 코로나가 앞으로 우리네 여행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지금 당장 예측하는 건 어렵겠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가장 기대되는 여행 형태로 많은 전문가들이 ‘순례’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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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길을 걷는다. 종교적 경험을 위해서 걷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여행의 한 형태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호흡하고 걸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
순례 여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순례가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이면서 대자연과 연결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순례 여행이 뜰 거라고 말하는 가장 큰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코로나 시대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치유를 위해 산이나 강 폭포 공원 등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순례 여행을 떠나는데 자격이나 거창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씩씩하게 걸으며 지금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면 된다. 코로나 이후 의미있는 새 시작을 위한 순례여행지 3곳을 소개한다.
01. 스페인 SPAIN
카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
2009년 5월 말부터 약 한 달 동안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1년 동안 네덜란드 교환학생 생활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산티아고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서울로 짐을 보내고 아버지가 쓰시던 30년 된 배낭을 받았다. 부모님께 기숙사 보증금을 여행 경비로 써도 된다는 허락도 받아냈다. 그렇게 800㎞를 온전히 두 발로 걸어서 가야 하는 내생에 첫 순례 여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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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스페인 수호성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의 역사는 9세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된 이후부터로 본다.
유럽 사람들은 ‘집 문을 열고 나오면 그때부터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자기 집 앞부터 걷기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여럿 봤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코스가 있다. 가장 유명한 건 프랑스 ‘생 장 피에드 포르트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고 국경을 지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가는 프랑스 길이다. 순례자 70%가 이 길을 택한다.
800㎞를 전부 걸으려면 최소 한 달이 걸린다. 해서 짧은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일주일 여정으로 온 사람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가까운 대도시 레온Leon 혹은 사리아Sarria부터 걷기도 한다. 길 위의 순례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는 지점이지만 한 달 순례자와 일주일 순례자는 확연히 구분된다. 얼굴 절반 이상이 수염으로 뒤덮인 사람, 고글 자국만 남고 얼굴이 검게 변해버린 사람, 생장 피에드 포르트에서 받은 가리비 역시 그새 색이 바랬다. 일주일 순례자들과는 포스부터가 다르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순례길을 걷는다. 은퇴하고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러 왔다는 사람도 있고 중요한 시험을 끝내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 걷는다는 젊은이도 있었다.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뇌리에 깊이 남은 순례자도 있다. 부인이 치매 판정을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기억이 온전할 때 함께 길을 걷고자 왔다는 이본인 노부부. 먼저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걷는 엄마 등 묵직한 사연에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 순례자’라는 동질감 하나로 인종·나이·성별·종교 등을 뛰어넘어 마치 운명공동체처럼 행동한다. 끊임없이 안부를 묻고 서로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잠시 쉬려고 길바닥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괜찮냐고 묻고는 물과 초콜릿, 과일 등 간식을 놓고 간다. 길을 걷는 30여 일 동안 마치 서로를 가족 같이 보듬는다.
순례자 길을 걸을 때 나이가 24살이었다. 길을 걷다가 사람들과 친해지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왜 이 길을 걷나요?”였다. 심지어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말이다. 그때 했던 대답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냥 한번 걷고 싶었다” 이거였던 것 같다.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은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 조급함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여행 후 몇 년간 “난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곳은 바로 산티아고 길이었고 한국에서 이리저리 치여 벼랑 끝에 몰리면 산티아고 길로 떠나 작게 라면집이라도 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02. 부탄 Bhutan
트랜스 부탄 트레일 Trans Bhutan Trail
부탄을 가게 된다면 일정에 꼭 넣고 싶은 곳이 있다. 2022년 3월 개통하는 ‘트랜스 부탄 트레일Trans Bhutan Trail’이다.
출처=trans bhutan trail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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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부탄 트레일은 동쪽 트라시강Trashigang부터 서쪽 하Haa까지 403㎞ 이어진다. 깊은 산 속 숲과 초원을 가로지르며 마을과 마을을 연결한다. 트랜스 부탄 트레일의 뿌리는 고대 실크로드다. 현재 복원된 트랜스 부탄 트레일은 16세기 때 모습을 기반으로 하는데, 주로 불교 신자들이 부탄 서쪽과 티벳에 위치한 순례지로 가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 트레일에는 200개 이상의 불교 성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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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부 부탄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몇몇 구간이 순례길과 겹쳤다. 사람들이 다니던 보도와 계단, 다리가 무너지고 큰 도로가 놓였다. 순례길은 점차 흔적이 지워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갔다. 그렇게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2018년 부탄 국왕이 부탄 관광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트레일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복원 공사는 계속됐다. 부탄 왕립 정부는 코로나 때문에 일시적으로 실업자가 된 노동자 900여 명을 모았다. 끊어졌던 구간 수백 ㎞ 잇고 다리 18개와 1만 개 이상의 계단을 만들었다.
03. 충남 당진
당진 버그내 순례길
충남 당진에 가면 버그내 순례길이 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와 마찬가지로 이곳은 천주교 성지를 엮은 순례길이다. 13㎞의 버그내 순례길에는 순례지 7곳이 포함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솔뫼성지에서 시작해 합덕읍내~합덕제~합덕성당~무명순교자의 묘를 지나 신리성지에서 끝난다.
버그내는 삽교천의 옛 지명이다. 큰 하천에 버금간다 해서 버그내가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버그내 물줄기를 따라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보급됐다. 낯선 땅에 천주교를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고 순교자들의 흔적을 따라 길을 낸 것이 바로 버그내 순례길이다.
종착점 신리성지는 당진 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가슴 시원하게 확 트인 들판에 나지막이 솟은 언덕 위로 순교미술관이 우뚝 솟아 있다. 꼭대기에 철 십자가 얹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십자가는 옛날 위앵 신부가 신리를 처음 찾았을 때 그를 맞아준 신자 400명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철사 400개를 엮어 만들었는데 마치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선 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