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금동 귀고리 (외 2편)
⸺순장(殉葬)
송재학
1500년 전 열여섯 살 소녀의 왼쪽 금동 귀고리는 찰랑거렸다 귓불에 부딪치는 패금의 귀엣말은 달콤했다 누가 건네주었을까 바꽃의 독즙은 쓰디쓰다고 소녀의 금동 귀고리 하나는 진자 운동 하면서 누군가의 오른쪽 귀로 건너갔고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건 언젠가 나타날 아지랑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환(耳環) 모양의 아지랑이는 아직 없다 처음 소녀가 설렘으로 귀고리를 감추었을 때 미열 봉지로 친친 감쌌겠다 왼쪽 금동 귀고리가 꿰찬 빈혈의 몸은 열두 줄 가야 하늘의 속청처럼 푸르다 그래서 봄이란 이름에는 허공으로 올라가는 아지랑이 발자국이 있다 아, 가야금의 기러기발과 비슷하겠다 여름에는 여름 또는 초록이라고도 불렸다 눈이라는 이름에도 고개 돌려 하하 웃었다 별이라는 이름도 실팍했다 금이라는 이름으로도 냉큼 달려갔다 지금 소녀의 명찰은 22-01. 고고학이 만든 숫자이다 아직 부식이 끝나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민박
툇마루의 놋요강에 오줌발을 내린다
막 개칠을 시작하는 소나기는 미닫이부터 적신다
비안개의 아가미를 숨겨왔던 새벽이다
추녀의 숫자만큼 뒹구는 빗방울
느린 시간의 뒤에 좀벌레처럼 머무는 빗방울
머위 잎을 기어이 구부리는 빗방울
빨랫줄의 참새가 방금 몸살을 터는 중이다
자주달개비 혀에 보랏빛이 번지는 중이다
질펀해질 마당이 막 소란해지는 중이다
자세히 보니 모두 알몸이어라
옛 사진에서 얼굴의 해석
얼굴은 원래 복잡했지만 바늘구멍의 오랜 노출을 거치면서 쉽고 단순해졌다 접근이 쉬운 이목구비만 유곽의 네온처럼 벽에 걸렸다
하지만 플랑드르 화가들처럼 나 역시 얼굴의 복잡한 심리학에 마음이 끌린다 데스마스크를 묘사한 초상화에서 코발트색 염료가 주검을 숨긴 것처럼 얼굴에는 오글오글 저녁이 모여 있다
찡그린 눈썹 때문에 저 낯선 소묘가 내 얼굴인지 의심되는 순간, 얼굴의 심리는 흐릿하지만 풍경과 멀어진 흑백이란 점에서 안도감이 생긴다 프레임으로부터 소외된 기하학은 희게 날아가버렸다 얼굴은 바늘구멍 너머 앙금부터 재해석되었다 저건 사람으로부터 추출된 근대의 표정이 아니라 원시 동굴의 벽화처럼 정령에 가깝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얼굴의 기억을 더듬으면 짐승과 사람이 같은 해골을 사용하고 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별과 어둠이 있는 것처럼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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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학교 졸업.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기억들』 『진흙 얼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검은색』『슬프다 풀 끗혜 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