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는 우리 소설사의 첫머리에 놓이는 작품이다.다섯편의 길지 않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이로 말미암아 배태된 고독감이 전면에 짙게 깔려 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초월적 운명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어떤 힘을 지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여러해 전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쳤을 때,그해 대학입시에서 도예과의 입학성적이 10점에서 20점 가량 높아졌더라는 얘기를 들었다.영화 속 주인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이 인상 깊었던 탓이라는 것이다.홍콩에서 만든 ‘천녀유혼’이라는 영화는 2탄,3탄의 시리즈가 나올 정도로 예상외의 호응을 받았고,‘은행나무 침대’란 국산 영화도 수십만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황당한 이야기속의 진실
이 세 영화는 모두 결코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교통사고로 죽은 남자의 영혼과 살아있는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이미 오래 전에 죽은 여자 귀신과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아니면 전생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환생해서까지 이루려는 지순한 사랑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최근 TV에서도 ‘이야기 속으로’나 ‘미스테리 극장’처럼 주로 귀신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귀신 이야기에 대한 일반의 기호는 꽤 뿌리가 깊은 듯하다.더구나 그것이 사랑 이야기일 때 대중들의 호응은 자못 폭발적임을 위 세편 영화의 성공은 잘 말해준다.과학 이론으로 무장된 최첨단의 시대에 이러한 허무맹랑한 얘기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 속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가? 그것은 혹 아슬한 삶의 속도감 속에서 까맣게 잃어버린 소중한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은 아닐까?
○전혀 새로운 형식의 소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의 다섯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제목에 ‘신화(新話)’란 말을 붙이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이들 이야기는 당시 독자들에게 전에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다섯편 가운데 처음 세 편은 죽은 여인 또는 전설 속 선녀와의 사랑 이야기이고,뒤의 두 편은 염라국과 용궁에 다녀온 선비가 그곳에서 듣고 본 이야기를 적은 기록이다.
다섯 편 모두 사람과 귀신과의 사랑 또는 이계(異界)로의 진입을 다루고 있는 셈인데,여기에 등장하는 남주인공들은 모두 현실에서 좌절의 쓴 경험을 맛본 인물들이다.그러므로 이들이 엮어내는 낭만적 환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불우를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빚어낸 ‘가상현실’일 뿐이다.
‘이생규장전’의 이생은 전란통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내를 다시 만나 꿈같은 신혼을 보내고, ‘만복사저포기’의 노총각 양생은 부처와의 내기에서 이겨 아름다운 처녀를 점지받게 된다.또 ‘취유부벽정기’에 나오는 홍생은 부벽루 아래에서 고대의 선녀 기씨녀(箕氏女)와 만나 하룻밤의 꿈같은 대화를 나눈다.
○‘가상현실’의 아니러니
그러나 이러한 ‘가상현실’의 환상은 아내가 저승으로 다시 떠나가 버리거나,그 처녀가 죽은 귀신임을 깨닫는 순간,급전직하 차가운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그들은 현실의 불우에서 벗어나고자 ‘가상현실’을 꿈꾸었는데,꿈이 깨는 순간 그러한 꿈이 지상에는 결코 존재치 않는 것임을 깨닫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금오신화’ 속에 그려진 현실세계는 모순과 불합리,전쟁과 모험,약탈과 살육 등 온갖 추악한 가치들이 횡행하는 비정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이를 벗어난 가상의 공간 위에 삶의 이상을 그려 보이려 했다는 것은,현실에서 이상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여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알고 보면 인생은 얼마나 불가해한 일들의 연속이며,운명은 또 폭력적인가? 정의는 승리하기는커녕 씁쓸한 패배를 강요당하고, 공도(公道)는 언제나 행해지지 않는다.정당한 노력은 그만큼의 보상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금오신화’가 다른 고전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들은 사랑의 영원한 이별을 맞보거나 이계에서 귀환한 뒤,그간 집착했던 인간의 가치들을 훌훌 털어 내던지고 만다.어찌 보면 패배적 퇴영의식의 소산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그저 폭력적인 운명 앞에 순종하며 체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소극적 자세에 머물기를 거부한다.‘이생규장전’의 최녀(崔女)는 정조를 유린하려는 홍건적의 폭압 앞에 죽음으로 항거한다.겉으로 드러난 것은 돌아온 현실 앞에서 다시금 좌절을 곱씹으며 아예 현실에 뜻을 잃고 종적을 감추거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만,운명은 결코 그들의 내면 가치마저 짓밟지는 못한다.
○시대를 초월한 삶의 본질
오랫동안 연구자들을 당혹케 했던 것은 이 작품이 소설사의 가장 앞장에 있으면서도 그 미학의 수준이나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역대 어느 소설작품이 거둔 성취보다도 우뚝하다는 사실이었다.그렇다면 우리 소설사는 시작과 함께 이미 더이상 오를 수 없는 정점에 서버린 것일까? 매월당 김시습의 시대나 과학 최첨단의 오늘이나 삶의 본질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그가 고민했던 인생의 여러 문제는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이고,폭력적 현실의 모습도 그대로이다.무상한 권력,덧없는 명예,부질없는 집착에 사로잡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며 사는 것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다.
오늘날의 과학은 가상현실을 가능하게 하여,예전 꿈에서나 그릴 수 있던 일을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인간의 미망(迷妄)이야 앞으로도 끝이 없겠지만,그런 줄을 알기에 우리는 이렇듯 ‘황당해 보이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에 집착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