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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0일(화)
* 시작 기도
주님...
간밤에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여 밤새 오염된 나의 심령을 주의 보혈로 말갛게 씻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이 하루도 만물 안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날이지만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주의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기주장의지 등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부인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여 주소서.
내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원하오니 주의 은혜와 긍휼을 허락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7:15-29
제목 :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크고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 이미 있는 것도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26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을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27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 내 마음이 계속 찾아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 나의 묵상
코헬렛 즉 전도자는 계속해서 해 아래에서의 지혜를 찾아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의 물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몫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질문 앞에서 피해갈 수 없다.
하여 불완전한 인간의 자기 의와 지혜를 의지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질 것이다.
특히 자기 의와 지혜에 대한 한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적을 통해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세나 악으로 치우치는 자세를 경계하라고 권면한다.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의지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교훈한다.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으로 매사를 판단하거나 지나치게 자신의 지혜나 이성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따.
하지만 인간이 지닌 지혜, 인간의 이성은 모두 불완전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지혜나 이성에 의지하여 판단하고 행하는 사람은 실패하기 쉽고 결국 궁극적으로 허무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다 하나님께 굴복시키되 우리의 이성적 판단까지도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에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전도자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모든 일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의로운 삶을 살면서도 망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죄악된 삶을 살면서도 오랫동안 장수하는 인생도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의로운 체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운 체 하지 말 것이다.
그러다가 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한 너무 악하게 굴지 말며 어리석은 자처럼 굴지도 말 것이다.
어찌하여 자기의 수명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죽으려 하는가?
이것도 잡고 저것도 놓지 않는 것 곧 자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극단을 피할 것이다.
지혜가 주는 힘은 한 성을 지키는 열 명의 장수의 힘보다 강하다.
제아무리 의롭다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 뭐라 하든지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너 또한 가끔씩 남을 저주하지 않았더냐?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자 힘써 지혜를 시험하였다.
내가 마음 먹은 것은 ‘정말 지혜롭게 행동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세상 일을 아는 것이 너무 어렵고 이해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누가 과연 이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거듭거듭 마음에 작정하고 지혜와 세상 이치를 깨닫고자 공부하고 탐구하고 연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악하게 하는 일이 어리석으며 또한 어리석음이 미친 짓임도 깨달았다.
내가 깨우친 것은, 마음이 함정과 그물 같고, 그 손이 포박하는 포승줄 같은 여인은 죽음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 여인을 피하지만, 죄인은 그 여인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전도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샅샅이 살펴서 깨우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두루 살펴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천 명의 남자들 중에서 의로운 한 사람을 찾았지만, 여인들 중에서는 한 명도 찾지 못하였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 한 가지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셨지만, 사람들이 많은 꾀를 내었다는 것이다.
23절과 24절을 보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고 말한다.
우선 23절에서 두 번 언급된 지혜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상반절에서의 지혜는 솔로몬 자신의 지혜 곧 인간의 지성을 의미하며 하반절의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도자는 자기의 지혜를 다 동원하여 아무리 궁구하고 인간 지혜로 하나님의 창조적 지혜가 나타나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하려 해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 예는 욥기 38-41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욥의 대화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현자인 욥은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릴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나아가 신약 시대의 최고의 현자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과 행사를 묵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경이에 사로잡혀 탄성을 지르며 이렇게 고백을 한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와 같이 성경의 증언은 인간의 지혜와 지성의 한계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를 말해 준다.
지금부터 3천 년 이전에 살던 솔로몬의 지혜는 어쩌면 오늘날 과학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 시대와 비교하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지혜자라 할지라도 조족지혈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비약적인 과학 문명의 발전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지식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직도 하나님의 지혜에 발꿈치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후 3천 년이 흐른 오늘 이 시대도 여전히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창조물에 대한 지식은 가장 기초적인 것에도 비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피조물된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린 채 조만간 인간이 하나님을 능가할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으려 하면서 생명까지 창조해 내려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창조의 권위를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주를 향하여 도전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아무리 기고만장한 인간이라도 대지진이나 대형 산불 그리고 폭우나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 손을 쓸 줄 모른다.
그저 넋 놓고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전한 일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더 이상 물로 심판 당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시날 땅에 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이 성읍과 탑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은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니까 그들은 성과 탑을 쌓는 일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지만 어떠한 경우도 하나님의 권위 곧 그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비록 그 도전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결단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를 도전하는 일은 이 세상 곧 만물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극히 제한적인 도전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위 곧 영원에 속한 창세전의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생, 그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종결되는 일이 아닌 영원에 속한 만물 위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였다.
하나님도 그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속한 자의 능력에 치부하거나 아니면 전혀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지식적, 관념적 초능력의 신으로만 생각하였던 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4차원 또는 5차원의 세계에 사시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이시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상상할 수도 없는 분이셨지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그 구속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로 나도 아들이 된 것이다.
예수는 나의 큰 형님이 되시고 나는 그의 아우가 되어 형님을 따라 하는 따라쟁이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큰 형님을 따라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나의 옛 사람을 죽이며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당당히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죄인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나의 죄가 결단코 나의 구원을 취소할 수 없음은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창세전 언약이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되었고 또한 오늘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비천하고 열악하며 가난하지만 나는 오늘도 예수로 부요한 자로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 역시 자신의 신분을 비천한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눅 1:48a)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해서 그녀 역시 하나님일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곳 베트남은 불교의 나라이면서도 또한 카톨릭은 받아들여서 온갖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카톨릭은 미신적 요소가 상당한데 거기에 베트남의 토속 종교와 어우러져 온갖 짬뽕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원합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공산주의라는 너무도 거대한 카르텔이 형성되어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태산과 같으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가능함을 믿습니다.
이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되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지혜가 이 땅에도 온전히 틈입하여 들어와 카이로스의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