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소 2,1-10 루카 12,13-21
어느 선배 신부님이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니 교우 분들이 쌈짓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들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성지 주변의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영어를 통 몰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는데,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아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성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신부님은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외국어를 몰라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참 편하고 당당해지는 세상입니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 미사 때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세월, 예수님, 우정, 부모님, 사랑, 하늘 나라, 믿음 등 의외로 많은 것들을
대답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제주교구 신학생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교구의 모든 신부님을 찾아가
세배하고, 이때 받은 세뱃돈을 모아 일 년 살림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적어도
십 분의 일 이상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나눔의 가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는 법을 이렇게 신학생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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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소 2,1-10 루카 12,13-21
세상에 ‘돈’보다 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도 가족 간에 벌어진 재산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돈의 마력을 우리 모두 경험합니다. 그저 돈 많이 버는 직업을,
돈 많이 주는 직장을 최고로 칩니다.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이나 큰 이익을 거두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으로 칭송받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분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부와 재산에 대한 탐욕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은 산상 설교에서 행복에 대한 선언들만 쭉 나열하고 있다면(5,3-12 참조),
루카 복음은 부자들을 향한 불행 선언들도 함께 소개합니다(6,24-26 참조).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16,19-31 참조).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도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지는 비유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거두어들인 많은 소출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쌓아 놓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합니다. 그저 모아 둘 생각만 하는 그의 고민은,
기존의 곳간을 허물고 더 큰 곳간을 짓겠다는 결심으로 끝나 버립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가진 재산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모으고 보자는 마음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통장에 찍힌 잔고에 흐뭇해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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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소 2,1-10 루카 12,13-21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 13)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속셈은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니, 마음속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자신들의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면, 말입니다.
나의 편리와 이익을 계산하며 형제에게 시간과 노고를 내어주는데 인색할 때가
바로 그럴 때일 것입니다.
또한 나의 뜻과 나의 계산으로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일 것입니다.
만약에, 내 마음 안에 탐욕과 이해타산이 아닌, 사랑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손해 보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진정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루카 12, 15)
그렇습니다. 재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
당연히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도 아니요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탐욕으로부터 떠나지 못함은 아직 진정한 값진 것을 찾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값진 것을 찾게 되면, 일체의 다른 것들로부터는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 값진 것 앞에서는 상대화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말입니다.
그러니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자신을 가장 값지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안토니오 더블유).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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