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에페소 2,12-22 루카 12,35-38
서양의 사상과 종교는 ‘도(道)’를 이야기합니다.
도는 율법과 계명이 됩니다. 도는 기준과 원칙이 됩니다. 도는 진리와 생명이 됩니다.
그러기에 도와 도가 아닌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본질과 현상, 죄와 벌, 전쟁과 평화, 천국과 지옥,
남과 여,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이런 도는 나와 너를 구별하게 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게 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구별하게 합니다. 공존을 위해서 대화와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도가 아닌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과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지금도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로 폭력이 벌어집니다.
국가의 이익을 기준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생깁니다. ‘G7, G20, OECD'와 같이 경제적인 규모와 힘에 의해서 국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서양의 사상과 종교가 가지는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었고,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과학과 기술로 인류의 수명은 길어졌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道)라고 항상 말하는 도(道)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미시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0 –23)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는 말을 자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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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영 베드로 신부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에페소 2,12-22 루카 12,35-38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 평화는 민족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들이 적개심을 버리고 화해하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사람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민족들이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진리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들어가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악과 불의에 대항하려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인생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날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급을 주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넘치도록 채울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자녀들은 복됩니다.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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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에페소 2,12-22 루카 12,35-38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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