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에페소 3,2-12 루카 12,39-48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결되는 오늘 비유 말씀은 특히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실한 집사와 불충실한 집사의 이미지가
뚜렷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관리할 집사를 하나 뽑아서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줄 임무를
부여하고 떠납니다. 만일 그 집사가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도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나중에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더 큰 임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집사가 불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늦게 오리라는 생각에 종들을 함부로 대하고,
또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오게 되면,
그는 엄한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직자든 수도자든 아니면 평신도든,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충실한 집사와 같은 모습을 경계해야 합니다.
‘집주인’께서 맡기신 힘과 권한을 마치 제 것인 양 착각하거나, 또는 그렇게 여기고 싶은 유혹이
자주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어떤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한 도구로 여기기보다,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 곧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야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힘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권한을 행사하는 이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곱절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는 겸손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지도자들임을 명심합시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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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에페소 3,2-12 루카 12,39-4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문명(文明)과 문화(文化)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있는 단어입니다. 문명은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지의 세상에 있는 이들에게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는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진리의 빛을 동쪽으로
전하였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에 불교는 전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진리이 빛을 서쪽으로 전하였습니다. 로마,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불교도
서쪽으로 전해지고 있고, 그리스도교도 동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문명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유럽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FAX AMERICA’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문명은 그리스, 로마의 의회 정치가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전해졌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화는 창조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학은 이런 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현대사회가 누리는 풍요로움은 이런 과학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물, 석탄, 원자력은 변화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됩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도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활동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유전공학, 생명공학,
의학은 변화를 추구하며 우리의 생명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변화는 문학, 미술, 음악, 건축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고전은 인류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한편의 글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고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된 미술은 인간의 꿈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인 소리는 음악이 되어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건축은 인간이 머무는 공간에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이 되었고, 문화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명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에게는 용기의 빛이 되셨습니다.
병들고 아픈 이들에게는 치유의 빛이 되셨습니다. 이방인과 죄인들에게는 희망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입니다. 갈릴래아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하신 것 또한 문명의 시작입니다.
어둠에 빛을, 슬픔에 기쁨을, 절망에 희망을, 미움은 용서로, 다툼은 화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화의 모습도 보여 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깨끗하게 치유하셨습니다.
죽었던 소녀와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는 변화되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와 가족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끝난 다음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신비인 성체성사입니다.
문명과 문화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지역과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제국주의가 되고 맙니다. 식민지의 역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는 철저하게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명과 문화를 전하는 방법을 우리게 알려 주셨습니다. ‘섬김과 비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전하려는 사람은 불의한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신의 뜻만을 전하려는 사람은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명과 문화가 상대방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명과 문화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하여 깨달은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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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에페소 3,2-12 루카 12,39-48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는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있음'에 대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부분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뒷부분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충실함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청지기에게는
바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슬기로움’이 요청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움’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
(루카 12,42)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곧 주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편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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