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소 3,14-21 루카 12,49-53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소 평화를 베푸시고(루카 복음 7장 50절 참조),
제자들에게는 평화의 인사를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루카 복음 10장 5절 참조).
무엇보다도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께서 ‘세상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그분의 평화는 많은 재산으로 말미암은 안락한 생활이나
전쟁의 승리로 누리게 되는 일시적인 평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한 다짐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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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소 3,14-21 루카 12,49-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세례’와 ‘분열’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구약 성경에서 불은
‘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무엇보다 세상을 정화하는 불을 일으키시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그 불로써 온전하고 합당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루카 3,16 참조). 따라서 그분께서 세상에
지르고자 하시는 불은 우리가 세례로 받게 되는 성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1-13 참조).
세례로 받은 성령의 불로 단련되고 정화되는 신앙인들의 삶이란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화의 과정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고통을 겪으시어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란 당신께서 겪으셔야 하였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시련의 길을 몸소 앞장서 걸어 주신 분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신 그분께서는 신앙인들의 힘겨움을
잘 아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앙 여정에는 갈등이 따르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정까지도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께서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화는 단순히 표면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이나 마음의 평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온전한 충만함이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충만함으로 향하는 굴곡의 여정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불’과 ‘세례’와 ‘분열’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 여정을 다시 정의해 보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믿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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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소 3,14-21 루카 12,49-53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는 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의 머리글이 유난히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던
학생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가끔 편지를 보내주었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위문편지를
보내주곤 했습니다. 정갈한 글씨의 편지를 읽을 때면 군 생활의 어려움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언제나 첫 문장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머리글입니다. 지금은 손 편지를 쓸 필요가 거의 없지만 가끔은
정성어린 손 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수도자가 되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전하는 수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제게 당부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를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른들에게 공손하라고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부족한 것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영성지도를 받았던 신학생들이 찾아 올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3가지 덕담을 해 주곤 했습니다.
늘 건강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분명 아플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지나 가는 것이니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지내기를 바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한다면 이 세상의 시련과 고통을 겨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우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하고, 그 군대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입니다. 항우는 갑자기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라고 명령을 내리고,
뒤이어 싣고 온 솥마저도 깨뜨려 버리고 주위의 집들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 말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을 구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부침주와 사즉생 생즉사’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가정도, 이웃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친구도, 이웃도 갈라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갈라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장애인인 자녀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른 척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세례를 받은 신앙 공동체이지만 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이 ‘새롭게 부임하는 본당에서는 적어도 6개월은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6개월만 지켜보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이 앞서면 가족이라 해도, 친구라 해도, 이웃이라 해도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리 성격이 달라도, 오랜 갈등이 있었다 해도,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다 해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