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획을 질질 끌다가, 며칠전 백수가 된 김에, 한큐에 끝내버리자고 맘 잡고 쓰는 글입니다. 문예 이론에 대한 이야기들은 1부에서 할말 다 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판타지를 되짚어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써보았습니다. 몇번 손질한 1부와는 다르게 초고이기때문에 고쳐야할 부분이 매우 많으므로, 이점 양해바랍니다.
역시 각주는 아래에 달았지만, 1부에서처럼 필연적인것은 아니니, 천천히 참고하시면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20세기 문학계의 가장 커다란 쟁점들은 바로 중남미 문학이 주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20~1930년대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에 이어서, 중남미 샤머니즘과 유럽의 리얼리즘이 약간은 불편한, 그러나 성공적인 동거를 시작한 오사리오 키로가, 로아 바스토스, 비오이 카사레스 등의 중남미 작가 군은 푸코가 지적한 '타자'로서의 문학적 쟁점을 본격적인 도마 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문학의 흐름은 급격히 재편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술적 사실주의가 위치하고 있다. 사상사적으로 훓어보자면, 이러한 제3세계 문학의 주체화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시대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유럽의 정신사는 다원적 주체의 파괴, 즉 신화의 파괴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한다.(주1) 다원론이 인정되는 신화체계는 곧 이데아라는 절대적 이념으로 통합되면서 소멸해버리고, 여기서 철학은 시작된다.(주2) 그리고 그런 일원적 주체는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일신론으로 구축되었다가, 다시 데카르트에 이르러 개인이 내재한 보편자아로 편속된다. 이 점은 문학사적 맥락을 짚어보아도, '총체적 시대'의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신의 섭리 아래서 인간사가 구축되는 볼프람의 서사시로, 그리고 다시 그것이 인간의 '인식'으로 귀결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들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그다지 신용 없는 주장은 아닌 듯 하다. 문학적 주체는 처음 문학이 시작되었을 때는 완전무결한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갖추고 있다가,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파괴되고, 자아로 수렴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주3)
19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표면으로 떠오르는 과학은 철학의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서양철학 최대의 숙제였던, 세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은 이미 생물학과 물리학으로 역할이 넘어갔다. 과학과 이성 스스로에 의해서 철학은 변증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20세기 철학이 '존재론'을 붙잡고 설명하지 않으려는 이유, 그러니까 현대 철학의 주 흐름중 하나인 '언어 문제(혹은 언어학적 전회)', '실천적 비판', '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각은 그러므로 20세기 철학이 나아가야하는 필연적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4)
문학의 입작에서 흥미롭게 짚어볼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은 탈 형이상학적 사유, 그 중 가장 중요한 흐름중 하나인, '주체의 해체'와 연관되어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다시금 하버마스를 인용하자면, 다원론의 죽음으로 시작된 '일원론'의 서양철학은 주체의 왕좌를 잃으므로 인해서 '타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성의 정황화' 즉, 이성은 주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핵심이다. 푸코가 '광기'를 문화의 전면적 화두로 부각시킨 것도, 이성에 의해서 억눌려 있던 '비이성'적인 문제들이 이성이 정화화되면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성의 정황화'는 문화전반에 폭풍의 핵으로 작용하였고, 그 범위는 철학적 '타자'부터 에코페미니즘(생태주의)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이성의 정황화는 어디까지나 유럽의 근대철학의 입장에서의 '이성의 정황화'이다. 세르반테스기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한 이후로, 문학이 가지는 근대적 리얼리티는 '주체자아의 반성'에 그 핵심적 쟁점이 담겨져 있었다. 문학은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기능하였고 언제나 문학은 부메랑이 돼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주5) 물론 문예사적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언제나 줄다리기처럼 팽팽하게 연결되어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이성의 패러다임은 근대를 움직이는 추진력이었고, 이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가 붕괴되는 20세기에 이르러 리얼리즘 문학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자아는 더 이상 자신에게 없다는 사르트르에 이르면, 자아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근대 문학의 핵심은 즉 '자아의 리얼리즘'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주체를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성을 절대적 가치로 상정한 고전주의 문학이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設)을 이야기한 플로베르의 자연주의, 세상을 통찰력으로 바라보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까지 꿰뚫고 있다. 하지만, 철학적 헤게모니가 주체가 아닌 '타자'로 넘어간 이후, 이성은 정황화되고, '나'의 부재로 인한 '너'의 존재가 문학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푸코는 이 아이콘을 '광기'라고 말하고 있으며, 프로이트와 융은 '무의식'이라고 정리한다. 니체가 '초인'을 동경했던 이유는 리얼리즘 속에는 '더러운 피부병'이 있으며, '신은 죽었기 때문'이다. (주6)
그렇다면 문학은 어떤가? 근 300년간 리얼리즘으로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문학의 축은 붕괴된다. 데카당스, 미래파, 모더니즘. 19세기후반~20세기 초엽에 발생한 문예학적 특징들은 이러한 붕괴된 이성 속에서의 제자리찾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면서, 문학적 '타자'들에 초점을 맞춘 작가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타자로 억압받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조명되다가, 결국 사후에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 이름들은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보들레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것들이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쓰는 작품의 테마가 바로 '타자'에 대한 것들이다. 카프카는 작가 스스로가 바로 유럽의 타자인 유태인이었으며, 보르헤스는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의 작가였고, 보들레르는 인간의 광기에 대한 탐미적 집착을 보여왔다. 문학적 테마가 타자로 넘어가는 순간에 있는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적어도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성적 리얼리티의 부정이다. 그들은 리얼리티를 '허상'으로 간주하며 리얼리티가 아닌 것들에 대한 삶의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토마스 만이 카프카를 '문학 사상 가장 읽을만한 작품'이라고 추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주7)
보르헤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복잡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크게 세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유럽 카톨릭에 억압되 있던 중남미 토테미즘의 전면적 부각, 둘째로 기존 문학이 가지는 서술적 허구성의 파괴, 그리고 셋째로 장르문학의 본격적 수용이 그것이다.(주8)
이런 작가군들의 작품에는 타자와 함께 문학과 예술에서는 '환상'이라는 것이 이성의 대결도구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있던 위치의 작가들일수록 이런 점들은 두드러지게 보인다. (사회적 타자였던 고흐의 신인상파적 작품들이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니체의 중요한 작품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철저히 이성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참작해보아도 충분히 개연적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들의 영향이 전반을 지배하는 20세기 문학의 형식은 주체에 반대하는 타자, 이성에 반대하는 환상으로 그 커다란 특징을 거칠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판타지'를 문화적 담론의 핵심쟁점으로 삼는 것은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바라보는 창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그것의 뒤에는 '자아가 파괴된 곳에 존재하는 타자와 이성 뒤의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환상문학의 목소리 - 마술적 사실주의
타자를 문학의 머리로 올려놓는데는 사실 일련의 영미 SF/판타지 작가들과 중남미 작가들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남미 작가들은 테마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근대 리얼리즘 소설들을 철저히 배격하므로써, 자신의 위치를 타자로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50년대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하나인 멕시코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경우는 중단편 <아우라>에서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서술인칭부터가 1인칭이 아닌 2인칭, 즉 '너'가 소설의 주체화자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너는 그 광고를 본다." 따위의 것들이다. (주9) 이것은 문학기법적으로도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매우 독창적으로 해체한 경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품 안에서는 일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주체에 대한 타자들을 테마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의 배경은 '도심의 주택가'가 아닌, 도시로부터 벗어난 교외 변두리의 낡은 집이며, 식민지시대에 활약했던 100여년전 스페인 출신 멕시코 장교의 일기를 번역하면서 얻게되는 주체자아의 혼란 - 가령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들은 과연 스페인의 역사인가, 아니면 멕시코 자신의 역사인가 - 집의 소녀 아우라의 실존여부, 노파의 광기같은 것들이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분명 멕시코 근대 역사에서 스페인의 그늘에 눌려 타자화된 식민지 시대의 멕시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작품은 전체적으로 매우 비이성적인 플롯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보통 보르헤스, 움베르트 에코와 더불어 가장 포스트모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대개의 중남미 작품은 이렇게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제3세계의 주체성 혼란과 억압된 것들에 대해서 '리얼리티'의 변형으로서 이야기 한다. 보르헤스, 로아 바스토스, 환 룰포등의 작가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푸엔테스와 마르케스, 아옌데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소설 형식을 텍스트에 부여하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기법적으로 자동기술법을 사용한다. 철저히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에 의해서 작품을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붓가는대로'쓰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야기의 진행은 소설Plot이라기 보다는 이야기Story이며, 개연성이라기보다는 '직관'에 의해 작품이 흘러간다. 이런 특징은 마르케스의 대작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모든 형식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철저히 '이성'과 '리얼리티 소설'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마르케스가 '신화'라는 것을 차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노벨문학상의 수상이유로 분석되기도 했던 프리마 파시Prima Facie를 이용하여 리얼리티로 굳어진 소설의 내러티브를 신화와 동급의 '환상성'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주10) 이른바 '소설의 죽음'이란 것은 그러니까 '리얼리티 소설의 죽음'이라고 정정해야할정도로, 마르케스의 소설이 가지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근대 소설의 어법을 철저히 파괴시킨 그야말로 신개념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현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유행중 하나이며, 중남미 작가들이 서구의 이성이 가지는 근대 소설의 어법을 해체하여, 중남미 토양에서 돋아날 수 있는 자신들의 내러티브로 재구축한, 성공적인 타자의 주체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문학내의 타자, 그들의 목소리 - 장르문학
비단 중남미에서만 이런 타자의 목소리를 문학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문학에서의 타자로 비껴있던 작품들도 문학적 목소리를 내는데 상당히 성공한 작품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J.R.R 톨킨과 조 홀드먼, 어슐러 르귄, 그리고 레오나르도 파두라이다.
J.R.R 톨킨이 20세기 문학에서 가지는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장르판타지라는 문학의 서브 카테고리를 일구어낸 것도 있겠지만, 마르케스와는 다른 의미로 신화를 문학의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시켰다는 업적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톨킨이 이루어낸 가장 큰 위대함은 바로 문학 내에서 철저히 외면받아왔던,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취급받은 요정이야기Faery Tale를 바로 문학적 주체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아동문학이 정당한 문학의 멤버로 인정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점에서 톨킨은 환상문학뿐만 아니라 아동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흐름중 하나인 '장르 판타지'를 문학의 멤버로 소속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주11)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SF의 외삽을 이용하여 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인라인의 <스타쉽트루퍼스>와 같은 SF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하인라인이 보여준 전체주의 관점을 철저히 타자화시키면서 전쟁이 낳은 개인의 타자화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하나로서 SF적 특징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슐러 르귄은 특유의 작품성으로 '여성'을 인간의 본격적인 문제로 올려놓고 있다. 브레드베리와 키플링, 토마스 핀천과 아이작 아시모프, 스타니슬라프 렘이 연이어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아 이런 SF장르에 문학적 힘을 실어주면서 20세기 SF문학이 한낱 펄프픽션에 머물지 않음을 증명했다.
한편 E.A 포에서 시작한 추리소설 역시 장르의 기법을 문학적으로 치환하여, 타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장르로 끌어올린 작가들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보통 노벨라 네그라Novella Negra라고 불린다. 주로 중남미에서 발전한 작품 양상이라 이렇게 불리는데,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쿠바 작가중 하나인 레도나르도 파두라는 그의 연작 <마스카라>에서 추리소설과 더불어 퀴어 담론을 문학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이런 장르문학적으로, 그리고 현대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모두 장르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리얼리티로 특징지어진 소설의 어법을 장르적 어법으로 치환시키면서, 작품의 개성을 구축하고 리얼리즘 소설이 보여줄 수 없는 부분들을 건드리므로써 타자화된 주체를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는 요소를 안고 있다.
4. 매체의 개방 - 포스트 붐
위에서 보여준 타자의 문학적 특징들은 70년대를 넘어오면서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섞여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작품들은 모두 '포스트붐'소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장르문학적 특징과 타자에 대한 여러 소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작품의 테마를 상정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르케스의 세계적 성공 이후에 세계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포스트붐 소설의 특징을 간략히 서술하자면, 노벨라네그라, 장르문학, 마술적 사실주의가 지역, 국가, 문학 장르, 심지어 매체를 떠나서 자유롭게 연결되고 풀이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작가들은 주로 여류작가들이 많은데, 칠레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멕시코의 에우라 에스키벨, 미국의 에이미 탄, 토니 모리슨, 한국의 오정희 등이다. 이들은 장르문학과 리얼리즘문학, 신화, TV드라마나 시트콤, 영화적 기법들을 문학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가의 개성으로 묶어놓은 '조립형 문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에서 지나치게 과장되고 세밀하게 묘사되는 - 마치 영화의 고속촬영과 줌인을 사용한 듯한 - 장면연결이라든지, 시트콤을 방불케 하는 상황연출의 연속인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틈새>, 일상을 소설화시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타자들을 주체화시키는 문제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사랑받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이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현대인의 삶에서 완전히 밀려나있는 '죽음'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고오는 오정희의 <전갈>은 이런 점에서 1980년대 환상소설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런 특징들은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훨씬 극단적으로 발전한다. 테마나 기법에 있어서 타자화된 존재를 주체로 끌고 오는 이런 방식이 이미 1990년대에 이르러 자유롭게 활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작품들이 쏟아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는 작가들이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닐 게이먼의 경우는 <디스크월드> 3부작이나 <멋진 징조들>같은 작품들에서 오랜 세월 문학에서 버려졌던 우화-풍자문학을 가장 뛰어나게 인용한 작가로 이름남겨졌으며, 이것은 <하나님 끌기>로 일약 스타가 된 제임스 모로에게까지 연결되고 있다. 척 팔라닉은 <파이트클럽>에서 아주 헐리우드적인 발상과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을 기묘하게 배치하는데 성공하였고, 닉 혼비는 영국 시트콤이 가지는 코미디의 매력을 문학적으로 흡수한 성공적인 경우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90년대 이후 문학의 특징들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났으며, 작가의 개성에 따라서,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1990년대에는 포스트붐 소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가들의 개성으로 점철된 독창적인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난다. 아르토 페실리나의 <목매달린 여우의 숲>(핀란드), 응구기와 시옹오의 문제작 <한톨의 밀알>(케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본),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인도),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의 빨강>(이란),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벨기에)등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어느 면에서는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군은 작가의 지역-문화적 특성, 작가의 개인적 환경, 작가가 거주하는 국가의 문학적 색채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독창적 결과물들이다. 한국에도 1990년대 이후에 윤대녕, 박민규, 김영하, 한유주 같은 작가들이 환상문학의 위치에서, 그리고 현대문학의 위치에서 독창적인 개성을 가진 작품들을 남겼다.(주12)
5. 한국 환상문학의 전개
지금까지 우리는 20세기부터 주목을 받아온 소위 '환상문학'의 문학사적 특징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조망해 보았다. 20세기 문학의 주인공은 소위 말하는 제3세계 작가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그것은 유럽 근대의 리얼리티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리얼리트를 재건축하려는 그들 나름의 결실이었으며, 이를 자양분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매우 풍부한 '조립형 문학'이 가능해졌다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환상문학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혹은 한국 환상문학은 전개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진행중인가? 이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며, 고찰해보아야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우리는 다소 상투적이더라도 '한국적'이라는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민족적 개념은 대개 매체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정서적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지며, 이런 정서적 유산은 정신문화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조금 더 확대해석하면 신화에 그 뿌리를 두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주13) 따라서 많은 판타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깨비와 암행어사가 나오고, 부적이 등장하는 것이 동양적- 혹은 한국적 판타지가 아님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문학사적으로 살펴본다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굳이 인디언들이나 재규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라틴 아메리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형 판타지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왜냐면, 환 룰포나 보르헤스, 푸엔테스등 일련의 라틴 작가군들의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에 타자화된 자신들의 가려진 역사의 조각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14)
이들의 테마는 분실된 자신의 옛 얼굴과 조상들의 초상화를 찾는 일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로 변주되면서 중남미 문학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미권 제3세계 작가들 역시 영어문화와 자국 토속 문화의 불협화음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주15) 이는 정서적 측면이 문학의 지류를 가를 때 매체적 측면보다 훨씬 중요함을 반증하는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이러한 서구 이성의 해체적 산물로서의 텍스트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 가장 첫 번째의 지류로서 구인회의 멤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특히 박태원과 이상은 그 안에서 가장 독보적인 환상적 작가들이었다. 두 작가는 <무정>이후 정착된 근대 소설의 기법에 회의를 품은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그것은 기법의 파괴에 대한 한글적 변용으로 드러났다. 한문장으로 구성된 소설 <방란장 주인>이나 띄어쓰기를 파괴하고 한자와 한글의 유희적 사용이 돋보이는 이상의 텍스트들은 환상성을 재쳐두고서라도 소설의 서사적 문체를 한글로 사용하려는 최초의 시도로 평가받을만 하다.
구인회 작가 중에서 다다이즘의 성격이 두드러졌던 이상의 경우 환상적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지주회시>나 <휴업과사정>같은 소설은 매우 뛰어난 자의식기법과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여 자아의 내부를 파헤치는 심리적 경향의 환상소설을 보여주었다. 이상의 경우는 테마적으로 현대인의 정신착란적 광기들을 즐겨 사용하였고, 문체적으로는 서사적 문체를 한글이라는 언어매체를 이용하여 변용시키는 최초의 사례로서, 근대 서구 소설의 문체적 리얼리티를 한글적으로 재정립시킴과 동시에, 1900년대 초반 경성 조선인을 타자화시키는 독보적인 케이스로 눈여겨볼만 하다.(주16)
채만식의 경우 역시 한국 특유의 해학을 바탕으로 소설의 리얼리티를 부여하는데 성공한 작가로서, 이 경우 역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국의 해학을 소설로 풀이한 독보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로 1960년대까지 특별히 환상성의 측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들은 발굴되지 않았다. (주17)
리얼리즘이 초강세를 보이던 70년대에 우리는 한국 환상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박상륭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환상소설가다. 그의 대작 <죽음의 한 연구>는 사실상 한국문학이 이루어낸 가장 훌륭한 쾌거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우선 이상 이후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서술문체의 한국시적 사용을 가장 완성적으로 사용하여 서사적 내러티브를 완전히 한글로 정착시킨 모범적인 사례로 남겨질만 하다. 문체는 판소리 사설에서나 사용될법한 만연하고 구어체적인 특징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술적 체계가 아주 적절한 비율로 배합하고 있다. 이를테면 "공문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속중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 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라는 압도적인 작품 첫 머리는 곡유법이 미덕인 한글 판소리의 성격에 소설의 서사를 더하여 이루어진 가장 이상적인 시적 문체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문체가 작품 첫머리부터 작품 끝까지 치밀하게 끌고나가면서 문장하나하나마다 거대서사가 조금씩 얹혀져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 주제가 형이상학적인 면이 많다보니, 주제를 형상화하는 이야기가 모두 내재적 리얼리티로 꽉 찬 환상담으로 구성되어, 작품의 환상성이 문체에 그대로 녹아있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매력을 가진다. 이미저리로 점철되어 묘사가 강조되는 여타 '시적이라 불리는' 한국 판타지소설과는 그 성격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미지 중심이 시적 묘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시적묘사가 서사에 온전히 녹아있는 소설은 극히 드물다. 물론 이것은 작가 박상륭의 개성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한국 소설이 가지는 가장 유니크한 특징의 한 부분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말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서양의 근대소설의 주체를 해체한 다음 타자로 상정되는 문화에서 서사의 리얼리티를 재구축한 것이 포스트붐 소설의 특징이라면, 바로 이 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는 한국형 포스트 붐 소설의 대표적인 전형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작품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죽음의 한 연구>이다. 여기에서도 박상륭은 카발라, 연금술, 융심리학과 불교의 선사상을 이중적으로 배치하여, 주체가 되는 거대종교적 테마를 비교적으로 치환시키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 작품에서 종교와 비교는 모두 '죽음' 앞에서 해체되고, 변증적으로 상승한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죽음의 한 연구>는 죽음에 대한 서양적 텍스트에 대한 동양적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역시 서양 철학에 의해 타자화된 동양 사상에 대한 주체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은 노자의 자연변증법과 비슷하게, 죽음 앞에서 동서가 해체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분명 익숙한 근대 리얼리티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러한 박상륭 소설의 특징은 <칠조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오정희의 작품들은 시대적으로 마땅히 나왔어야할 시기에 당연히 나왔어야할 작품성과 성격을 가진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완구점 여인>이나 <유년의 뜰>처럼 초기에는 리얼리즘에 기반하여 일상의 문제를 접근하는 텍스트들이 주를 이루어지만 중기로 가면서, 이런 한국의 전형적인 리얼리트를 일그러뜨리면서, 산업화 시대의 도시인이 가지는 무관심과 심연에의 응시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래서 리얼리티와 환상이 기괴한 만남을 하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환상적 사실주의'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전갈>, <야회>, <밤비>, <인어>등 <바람의 넋>에 수록되어있는 그의 단편소설들은 분명 1930년대부터 맥을 같이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도회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접근하는 테마에 따라서 심리적 방법으로 일상을 기괴하게 왜곡시킨다. 군인에게 약을 지어주면서, 금고에 담긴 청산가리와 기억 사이의 갈등을 은연중에 표출하는 <밤비>나, 한국에서 이질적인 대상인 하나의 곤충을 타자화 시켜 권태와 죽음을 동일시 한다음, 감정이입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소설적 특징을 가진 <전갈>등은 80년대 가장 중요한 한국 단편소설중의 하나로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조롱하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 실존적 경향의 심리소설로 시작한 서정인은, <미로>에서 환상을 통한 현실의 광대놀음을 카프카와 같이 표현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대개 그것들은 거대한 사회의 매커니즘에 물화된 인간의 소외감을 표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연작소설 <달궁>부터는 한글 문체의 상투적 표현과 묘사적 접근에 대해 의문을 품더니, 결국 <용병대장> 3부작에서 서양 소설에 대한 한국적 수용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은 현재 진행형이며, 한국 환상소설이 가질 수 있는 기법적-정서적 가능성에 대한 또 하나의 출구이다.
시는 장르의 특성상 환상의 회복시야가 없이 창작이 불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에 모든 시가 환상시라고 정의내릴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회복의 시야가 매우 진한 시인들로서 전봉건, 박용래, 김종삼 등의 시인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다.
6. 개인의 시대 - 90년대~현재
윤대녕의 소설은 리얼리즘의 옷을 입은 교묘한 환상소설로서,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로 작용한다. <빛의 걸음걸이>나 <천지간>에는 박상륭처럼 환상적 묘사나, 오정희와 같은 리얼리티의 일그러짐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익숙한 인물, 익숙한 사건, 익숙한 장소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야기의 연결고리 - 플롯 - 의 매커니즘을 작가의 개성으로 빚어내므로써, 작품 전체에 대단한 환상적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다. <천지간>은 작가 윤대녕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1990년대에 유행했던 로맨스소설적 터치와 리얼리즘적 설득력, 내재적 리얼리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윤대녕과 공지영, 최윤의 등장 이후로, 한국 소설은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의 경계가 급격하게 허물어졌는데, 90년대 후반 그 틈을 타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영화와 TV드라마, 장르문학을 조립하는 김영하, 여성 특유의 댄디즘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묘사하는 배수아,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트레이드마크가 된 박민규, 영화적 기법을 소설로 끌고 오는 천명관, 각종 대중매체의 어법들을 자유자재로 소설에 삽입시키는 김연수, 현대인의 우울한 변두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유주 등의 작가들이다. 이들은 문예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위에서 지적한 한국적 포스트붐 소설의 조류는 아니지만, 1990년대 전세계문단에서 급물살을 탄 '조립식 문학'을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한국 현대 문학의 특수현상으로서 연구되고 읽히고 있다.
7. 장르문학으로서의 판타지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판타지소설'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한국적 판타지가 존재할까? 물론 문학의 환상성의 측면에서 이런 특징은 문학을 즐기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상기한 것처럼 한국 환상소설의 대부분은 한국적 환상성을 가진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개인주의가 강해지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화적 환경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이 중시되는 경향이 반영된 듯 보인다. 따라서 환상소설의 특징은 문화적-국가적-지역적 특성 보다는 작가 개인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해 결정되는 요인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장르문학 작가들이다.
듀나는 오랜기간 활동한 영화평론 경력과, PC통신 시절의 경험, 그리고 장르적 관심이 십분 반영된 상호텍스트적 작품들을 남겼다. <태평양 횡단특급>과 <나비전쟁>은 장르적 접근이 가능한 테마를 가지고 문학적으로 입혀서 사용한 경우이며 <면세구역>은 컨텍스트의 페스티시를 극한까지 사용하는 재기를 보여준 작품이다.
김중혁은 본연의 순수문학적 기질과 SF문학의 관심, 그리고 '아날로그의 향수'를 적절히 배합하여 <펭귄 뉴스>라는 이색적인 작품을 펼쳐보였다. 이 작품은 형식주의적으로 보아도 지극히 대중소설에 가까우며, 어법적으로는 장르문학이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문학 그것의 옷을 입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조립의 도구로서 장르매체들이 존재하며, 그걸 묶어주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려있다.
대다수의 90년대 후반 '판타지 소설 작가'들의 경우 유럽 판타지소설에 기반을 둔 RPG게임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영도는 TSR의 게임 던전앤드래곤즈(이하D&D)의 세계관과 톨킨류의 캠페인을 바탕으로 <드래곤라자>를 썼고, 일본식 RPG와 비쥬얼 노벨의 성격이 짙은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방지나의 <마왕의 육아일기>등, 절대다수의 판타지 소설들은 장르판타지에 영향을 받은 만화,RPG게임등의 하위매체의 영향을 받아 재생산된 작품들이다. 홍정훈의 <비상하는 매>의 경우 스티브 잭슨의 <먼치킨 핸드북>에 드러나는 루니형 캐릭터를 적절히 활용한 패러디-경이소설로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작가들의 특징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문학적 특수성을 획득한 경우는 드물다. 1부에서 언급하였지만, 이 경우 장르적 어법에 지나치게 치중하여, 작품을 쓰는데만 집중이 되었고 문학적 환상성에 대한 작가의 진중한 접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보면 장르 소설가들의 한계점이기도 하며, 굳이 문학적 특수성을 획득할 필요 없이, 장르적 게토 안에 거주하는 작품으로 존재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르문학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노력을 했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이영도와 전민희였다.
<드래곤 라자>로 스타덤에 오른 이영도는 자신의 캠페인이 너무 톨킨의 그늘에 가려져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 <퓨쳐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장르적 창조성을 염려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끌고 나갔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이 다양하게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오버더호라이즌>인데, 여기서 그는 '2차세계'가 약속되는 판타지소설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2차세계를 창작하는 '문법'을 새로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참신한 시야를 심어주는 데에 성공하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그는 대하소설에 가까운 <눈물을 마시는 새>시리즈로, 전혀 새로운 캠페인과 내러티브를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영도가 동양적 세계관을 가지고 '한국적 판타지'를 쓰려고 했음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인데, 한국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꽃에서 자라는 용'이라든가, 인도 신화에서 빌어온 '레콘', 굉장히 독자적으로 차용한 '두억시니'같은 캐릭터들은 신화 인간, 세계의 조화를 테마로 하는 이영도의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한국적인 작품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내러티브 적으로, 그리고 기법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라자>의 연장선이며, 장르 판타지로서의 특성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눈물을 마시는 새>의 소재들은 매우 동양적이지만,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국가관과 소설적 주제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역동적 내러티브는 서양의 장르 판타지소설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동양 고전 환상소설 - 이를테면 산해경이나, 한국 신화, 요재지이 등 -에서 보여지는 타종족과의 조화와 융합의 특징들이 전혀 보여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동양 고전 판타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얻어낼 수 없는 부분이다. (주18)
문체는 가장 치명적인 이영도의 약점으로 꼽힌다. 그의 문체는 <피를 마시는 새>까지도 톨킨류 민스트랄 금언의 변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진지한 한글적 사용의 고민을 그다지 하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따라서 문체-기법적으로 이 작품은 전형적인 번역체 한국 장르판타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의 돌>로 명성을 얻은 전민희는 <태양의 탑>과 <룬의 아이들>을 통해서 그의 소설방식이 점차 문체에서 서사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직선적이고 단순한, 그러면서 불협하는 플롯을 가지고 있던 것이, 민담의 내러티브를 사용하는 굉장히 정제된 플롯 양식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윈터러>는 그 훌륭한 결과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민희는 현재 장르판타지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들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 한명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거대서사의 치밀한 조직, 단순한 민담 서사를 소설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드러나는 문체적 한계점들이 그녀를 마르케스나 어슐러 르귄과 같은 대열의 작가로 올려놓기에 망설임을 만든다. 마르케스와 전민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스케일을 풀어나가는 '글재주'에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을 대표할만한'이라는 레테르를 수여할만한 장르판타지 소설을 들고 나온 작가는 보이지 않는 듯 하다.
8. 맺는 말
20세기 초에 리얼리즘을 해체할 가장 강력한 희망으로서 등장하였던 환상소설은 90년대가 지나가면서, 다시 해체되야할 대상으로 도마에 올랐고, 변증적으로 해체되면서 조립형 현대소설의 소재로 다루어 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환상소설'과 '판타지소설' 작가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의 경우 문학의 입장에서 도구의 하나로 판타지를 사용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장르판타지의 어법에만 묶여 있다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뛰어난 NT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도마뱀>같은 경우는 이런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수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이 단편집에 드러나는 인물들은 <풀 메탈패닉>이나 <슬레이어즈>같은 과격함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키노의 여행>이나
<공의 경계>가 가지는 정서는 공유하고 있다. (주19) 이것은 일본 문화의 통섭적 성격이 현대 문화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더불어 박민규나 김중혁의 장르소설이 문단에 어필하면서도 이영도와 전민희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로저 젤라즈니는 장르문학 안에서 반대의 시도, 즉 장르문학 내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시도를 조립해 나가면서 매우 독자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를 병행하는 작가들이 늘어난다면, 한국 장르문학의 폭 역시 매우 넓어질 것이다. 한국적인, 한국에서의 판타지가 특정한 어법과 소재, 정서에만 묶여있는 것은 아니며, 1990년대 이후의 환상문학의 소재는 개인주의적으로 치달으며 매우 잘게 쪼개지고, 곱게 빻아졌다. 마치 2000피스짜리 직소퍼즐과 같이, 그것은 순전히 조립하는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 대한민국에서, 우리말로 씌여지는 환상소설이라면,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며, 유럽의 리얼리티를 주체적으로 해체하여, 다채로운 '조립의 재료 매체'를 가지고 새로운 환상과 새로운 언어로 신선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구축해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값진, '한국 판타지'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주1) 하버마스, <탈 형이상학적 사유>
주2) 서양의 '철학'은 그러므로 플라톤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20세기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그래서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주3) 이 점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서도 거듭 지적되는 부분이다.
주4)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서 과학의 철학화에 의해 20세기 철학은 크게 네 가지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탈 형이상학적 사유'라고 정리하고 있다.
주5) 이것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의 결말부분에서 돈 키호테가 자신은 영웅이 아님을 '인식'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주6)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주7)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변신.카프카> 민음사 설명 中 인용)
주8) 첫 번째는 그의 작품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테리온의 집>, <신의 글>같은 단편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여지는 '상호텍스트', 그리고 세 번째는 E.A 포와 연결되어 있는 추리소설 형식의 문학작품들이다.
주9) '너'를 주체로 하는 '2인칭 시점'의 서술방식은 21세기 세계문학 소설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한국에서도 듀나와 김영하가 몇몇 단편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주10) 이에 대해서는 문학사상 1983년 12월호 <마르케스 특집>을 참고하라.
주11) 톨킨의 중요한 저작중 하나인 <Tree & Leaf>가 지금에 와서야 아동문학 연구가들에게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12)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주13) 이에 대해서는 제임스 프레이저를 비롯한 <제의학파>와 엘리아데를 비롯한 <시카고 학파>의 종교학 이론을 참조하라.
주14) 환 룰포의 단편 <루비나>의 경우 식민지와 개척, 유랑이라는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독특한 역사를 중남미 특유의 '환상적'묘사로 스케치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15) 이는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 응국기와 시옹오의 <한톨의 밀알>,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존 쿳시의 <포>등에서 잘 드러난다.
주16) 그의 작품은 작가적으로나 국문학적으로 매우 독창적인 위치에 있음은 첫째로 작가적 특성이 테마에서 드러나고, 둘째로 근대 유럽소설의 문체를 해체하여 한글로 재건축했다는 데에 있다.
주17) 1920~1940년대까지는 한국 문학의 르네상스기로서, 짧은 기간동안 유럽의 거의 모든 문학 스타일이 한국에 수용되어 작가들마다 자신의 스타일로 각종 유럽문예의 흐름을 받아들여 풍족한 결과물을 남겼으며, 그 중에 이상과 박태원은 환상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환상시의 면에서 특기할만한 시인으로 김광균과 이상화가 있는데, 둘다 상징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주18) 보르헤스가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핵심인물로 부각시킨 것은, 그가 소머리에 인간몸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인에게서 추방당한 어보민Abormin이라는 타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이 작품에서 아스테리온은 작품의 시야를 뒤집는 신선한 '경이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억시니에 대한 동양신화의 관점에서 두억시니의 존재는 신 이전의 '혼돈스러움'이고, 이영도는 이 점을 재해석 한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소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두억시니의 원래 원형적 아우라Aura는 중국의 혼돈(混沌)과 같은, 신 이전의 종족을 뜻하지만, 이영도는 이 작품에서 두억시니의 태생적 배경을 전도시키므로써, 동양 신화에 대한 새로운해석을 집어넣지는 않고 있다.
주19) 사실 반대의 경우지만, 일본의 NT소설의 경우 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사이의 일본 소설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첫댓글 꽃냥 간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