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오늘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에 대해 말하면서 묵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지율스님입니다. 저는 지율스님을 통해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스님께서는 천성산 구간 고속철도 관통반대를 위해 목숨을 거셨던 분입니다.
저는 스님의 고행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그 분을 옆에서 조금 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투쟁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가녀린 비구니 한 분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온몸으로 받으시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의 세력을 보았고 그 악의 세력에 짓밟히는 선하고 약한 존재들의
아우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시대의 징표를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저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저는 사제로서 비가 오겠다, 날씨가 몹시 덥겠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 시대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향한 목숨을 건 투신이 없다면 사이비 점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자기와 관련된 일들은 그토록 빌면서 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그토록 둔한 것입니까?
오늘날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경제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더 연결되어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인간성은 더욱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운 노동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고,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은 아쉬움을 더해갑니다.
사람이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악순환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자기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질서아래 같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나라, 힘있는 사람들은 그런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를 올바로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을 밝히고 짜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종교도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고 세상의 논리에 젖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신앙인 각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종교인들이 지율스님을 욕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덥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냐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제논리를 위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다른 것들을 죽여가며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좋고 고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을 위해 더 귀한 것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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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균 시몬 신부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소 4,1-6 루카 12,54-59
동틀 무렵
해가 쨍쨍하게 뜨면 사람들은 비가 올 것을 예측하고, 구름의 형세를 보고 날씨를 알아맞힙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여름에 비가 많이 안 오고 햇살이 강하면 포도 농사가 아주 잘 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사물과 자연의 형세를 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의 징표로서 간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비단 물리적 세계에 대한 예측을 위한 징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도 미래를 예견해주는
징표가 있습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와 같은 옛말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관련된 일의 징표를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주변에 제법 많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고, 이런저런 악재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소위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징표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어둡기 때문에
징표를 보지 못하는 일은 불가항력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 중 가장 어두운 때는 바로 동이 트기 전이라고 합니다.
새벽을 맞이하기 전의 그 어둠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해가 뜨면서 어둠을 산산조각 냅니다.
내 삶이 어둔 밤이라면 어쩌면 그 어둠 자체가 너무나 희망적인 징표가 아닐까요?
수원교구 최영균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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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소 4,1-6 루카 12,54-59
현대인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4차 산업 혁명의 물결로 급변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미리 갖추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학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가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일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미래 역량을 기르고자 열심히 노력하라고 주문합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가올 미래를 궁금해하고 이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주변에
용하다는 분을 찾아가 점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도 어쩌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지 모릅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미리 대비함으로써,
오늘을 좀 더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현상들은 때때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지표가 됩니다. 기후 현상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래전부터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지금의 기후 현상을 분석한 다음,
앞으로의 날씨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합니다. 오늘 복음도 이스라엘의 날씨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서쪽에 있는 지중해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면,
유다인들은 비를 예측하는데 실제로 비가 옵니다.
이스라엘 남쪽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유다인들은 곧 날씨가 더워질 것을
예측하고 또 실제로 더운 날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요 골자는 그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일에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면서,
왜 메시아가 와 있는 지금 상황, 곧 ‘이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굼뜨냐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현존과 활동으로 이어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분명한 표지와 표징들을 보았음에도
곧 다가올 종말과 심판을 준비하는 ‘회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입니다.
분명히 보았는데도 못 본 척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나무람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구원의 표징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