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규 마르코 신부
연중 제30주일
예레미야 31,7-9 히브리 5,1-6 마르코 10,46ㄴ-52
우리의 기도
어머니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분입니다. 누군가는 똑같은 울음이라
여길지 몰라도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 젖을 먹어야 하는지? 잠을 못자고 있는지?
아기의 울음에 어머니의 응답은 즉각적입니다.
심지어 아기가 소리 내지 않아도 어머니는 알아듣습니다.
어머니가 아기의 울음에 이렇게 반응한다면 세상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 에 어떻게 응답하실까?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다. 우리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곤경 속에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의 외침 역시 마찬 가지였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곁에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박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예리코를 떠나실 찰나, 모든 것이 닫힌 절망 속에서 그는 외칩니다.
그의 울부짖음에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그렇다 면 우리의 울부짖음에 하느님은 언제 응답해 주실까?
예수님은 나에게 언제 오시는가? "내가 바르게 기도하지 않아서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인가?
내 믿음이 부 족해서, 내 기도에는 절박함이 없어서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에 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외침은 예수님을 소환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의 외침에 앞서 끊임없이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의 비참함으로 다가가 그를 구원하시고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말씀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앞에 불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무력함 속에서 끊임없이 그에게 묻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신 것에 대 해 감사해야 합니다. 주변의 소음에도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조용히 꼭 붙들어주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통회하는 영혼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신 을 철저하게 어머니의 돌봄에 맡기듯이,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도록 내어맡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날마다 우리가 느끼는 무력함에 대해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아뢰는 데 있습니다.
원주교구 박동규 마르코 신부
2024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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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환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0주일
예레미야 31,7-9 히브리 5,1-6 마르코 10,46ㄴ-52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헬렌켈러가 어느 날 숲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헬렌켈러는 두 귀를 열고 두 눈을 뜨고도 별로 특별한 것을
보질 못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만일 나에게 사흘만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첫째 날은 자신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을 보고 싶고,
둘째 날은 아침엔 먼동이 트는 태양을 보고 싶고, 저녁엔 노을과 별을 보고 싶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자연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 일상의 삶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무엇을 그토록 보고 싶었길래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고함을 질렀을까?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고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가 외쳤던 소리에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간절함과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죽을 만큼 원하는 것이었기에 창피나 굴욕이나 체면 따위 등 남의 이목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으면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를 불러오라고 했을까 싶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 예수님께 다가서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묻자
그는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싶었길래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청했을까?
먼저, 보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만 보면서 눈먼 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께 청하면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산교구 오용환 가브리엘 신부
2024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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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흥 세알렉시오 신부
연중 제30주일
예레미야 31,7-9 히브리 5,1-6 마르코 10,46ㄴ-52
진정한 기도의 자세
오늘 복음에 바르티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한 것을 볼 때, 태생 소경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로 보입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적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천적인 경우는 그전까지 익혀왔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신체의 상실감은 물론,
심리적 상실감까지 가지게 됩니다. 이전의 자유로움을 알기에 예전의 온전함을 바라는 마음은
엄청나게 컸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차별과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 나머지 길거리에
앉아 구걸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분이 아니시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간절함은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것들이 막아서도 오로지 예수님 한 분께만 집중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저 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의 간절함이 결국 예수님께 닿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거지들이 있었을 그곳에서 오로지 바르티매오만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는 이는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간절함에 있다고 봅니다. 후천적 소경에 거지, 더 이상의 떨어질 바닥이 없는
바르티매오에게 있어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포기하는 사람, 욕심 가득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 의심 속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던 기도는
간절한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살리려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온전히 맡기는 마음으로 매달리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간절함 가운데 진심어린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바치면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망에 앞서서
우리의 기도가 바르티매오처럼 정말로 간절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간절했다면, 그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 믿음이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믿음에서 시작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간절한 믿음으로 매달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의 청력을 의심하기 전에, 그분의 무관심을 의심하기 전에,
과연 우리의 기도에 진정한 믿음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다윗의 자손(휘오스 다위드 υἱός Δαυίδ)
유다 사회는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외침입니다.
눈을 뜨고 병이 낫는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아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대구대교구 김병흥 세알렉시오 신부
2024년 10월 27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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