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안드레아 신부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루카 13,18-21
현시대를 가리켜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튀어야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고 희귀한 것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등’만을 치켜세우고,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매스컴도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공부나 대학도 일류, 기술도 일류, 운동도 일류, 심지어 도둑질이나 사기도 일류가 되어야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판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소개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의당, 하느님의 나라는 광대무변하니 아무래도 그렇지. 겨자씨와 같다니.
아뿔싸.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다(마태 13, 31-32에서는).
겨자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씨앗이 스스로 뿌려질 곳을 택하여 뿌려지는 법이 없다.
바람에 날리든, 사람이 땅을 갈고 뿌리든, 씨앗이 뿌려지는 데는 씨앗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자기는 좋은 씨니 좋은 땅에 뿌려 달라거나, 자기는 귀한 씨니 싹이 잘 트게 해 달라거나,
소출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름을 달라는 등의 ‘청원기도’를 올리는 법이 없다.
씨앗이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기름진 땅이든 뿌려진 자리에서 뿌려진 대로
자랄 뿐이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놓고 언제 싹이 돋나 어떻게 자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과정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란 싹이 돋아나 밭을 가득 채운다.
새싹은 농군도 모르는 사이에 자란다(참조. 마르 4, 26-29).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게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 안에서 소리없이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자라고 있다.
아,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시다.
아, 이제 누군들 하느님의 나라를 모를까 보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무슨 성과를 거두어야 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의 자유를 나누어 지녀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자기 몸에 안고 태어나며 그 씨앗은 점점 자란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낸 다음 이미 들어가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든 인생에 뿌려져 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모든 이들 안에 뿌려져 그 안에서 자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 이 세상 안에 뿌려져 자라고 있다.
천국을 이야기한다면서 지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만들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멀리하고 있다.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미운 사람을 만들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불의한 자를 만들고,
선을 강조하면서 악을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마음으로 선과 악, 밤과 낮, 밝음과 어둠을
대하게 한다.
세상을 창조 그대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을 갖게 한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를 가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도(마태 13, 30) 살게 한다.
선과 악을 가리실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누룩은 밀가루를 만나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룩은 누룩일 뿐이며, 밀가루는 밀가루 일 뿐이다.
누룩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
사실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며 혼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면서.
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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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소 5,21-33 루카 13,18-21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이용을 거부하며 항의하였고, 마틴 루서 킹을 중심으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이 전개됩니다. 결국 법원은 로자 파크스의 벌금형을 무효로 하고
몽고메리 버스의 인종 차별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듬해에는 공공 운송 수단에서 인종 차별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1964년에는 공공시설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시민권법이 제정됩니다.
<로자 파크스>의 작은 행동이
많은 흑인에게 힘을 주었고 인종 분리법 폐지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정원에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실천 하나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겨자씨를 이 사회라는 정원, 우리 가정이라는 정원에 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심을 때 정녕 하느님 나라는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몸소 겨자씨가 되시어 골고타라는 정원에 묻히시고 당신 스스로 썩어 없어지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십자 나무를 남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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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소 5,21-33 루카 13,18-21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이라는 공통 주제 안에서 서로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두 비유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남자는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심고,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분량의 반죽에 집어넣습니다.
정원에 심은 겨자씨는 어느덧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 나무의 크기는 보통 1미터 내외지만, 예외적으로 2미터 이상 자라나기도 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은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쳐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밀가루 서 말은 무려 50리터가 넘는 분량인데, 이는 성인 150명이 거뜬히 먹고도 남는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 그리고 누룩과 같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주 작은 크기 또는 적은 양 속에 숨어 있는 이들의 강력한 잠재력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약한 시작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힘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속성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는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와 그 탄생을 목격한 가난한 목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루카 2,1-20 참조).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그 아기는 커서 실망스럽게도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루카 23장 참조).
그러나 곧 반전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가 외치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져 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그리고 세상
곳곳에 퍼져 나가는 모습과 더불어 나날이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이천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다다랐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