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건진 조선 백자가 끊겼던 바닷길을 이었다.
12세기 말 일본 열도에서는 전란과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를 즈음해 왜구가 한반도 서남해안에 본격 출몰하기 시작했다.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부터 고려가 멸망한 1392년까지 41년간 왜구는 무려 468회나 우리나라를 침범한다.
우리 민족이 당한 전체 외침(900여회)의 절반 이상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귀중품을 실은 조운선이 왜구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지만 혼란기의 고려 조정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고려는 서남해에 13개 조창(조창)을 설치해 각 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미곡, 특산품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해로를 통해 개경의 벽란도까지 수송했다.
왜구의 극성으로 고려 말 이후 이 같은 조운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됐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해양 발굴조사에서 고려 청자만 수습될 뿐 조선백자는 전혀 나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5일 국립행량문화재연구소가 '난파선의 공동묘지' 또는 "바닷속 경주'로 불리는 충남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건져 올린 '마도4호선'과 조선백자 111점은 "바닷길 중심의 국가 물자 유통 시스템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육로로 일대 전환을 이뤘다"는 기존 학설을 부정하는 첫 사례여서 학계가 주목한다.
마도 4호선과 조선백자는 실로 우연한 기회에 조사팀 눈에 들어왔다.
올해 9월 마도 해역을 시굴조사 중이던 290t급 발굴조사선 '누리안호'가 기관 고장을 일으키자
조사팀은 작은 탐사선 18t급 '씨뮤즈호'로 조사지역 인근에서 별도 해역 탐색을 하던 중
고선박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목재 조각을 발견해 도자기가 묻힌 징후를 찾아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저에서 백자다발은 물론 선체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이들 백자는 관요가 아닌 지방 가마에서 제조돼 최고급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양 발굴에서는 최초로 인양된 조선백자라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무엇보다 백자 촛대 2점은 지금까지 발굴된 사례 없이 전세품(傳世品)만 남아 있어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촛대 세트를 제외하고는 사발 59점, 접시 40점, 잔 10점이었다.
사발 1점이 유실된 것을 감안할 때 백자는 10점 단위로 다발을 묶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박은 우현으로 기울어져 매몰돼 있으며 4단까지 확인된 좌현 외판재 주변에서는 원통형 목재가 다수 발견된다.
선미재는 일부만 남은 것으로 파악된다.
분청사기 2개는 이 선박 안에서 나왔다.
이 분청사기는 조선 중기인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백자 꾸러미는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생산된 것들로
보여 백자를 실었던 추가 선박의 발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분석이다. 태안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