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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나다나엘
요한복음 1:43-5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 후 둘째 주일이다. 여러분의 2024년은 잘 굴러가는가? 아마 작심3일을 반복하면서 살 것이다.
누구나 두 바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처음에 자전거를 배울 때에 출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시작이 어렵지 출발만 하면 그냥 굴러간다. 다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전거를 뒤쫓으시면서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 주시길 바란다.
여러분에게 나와 함께 나란히 달리는 친구가 있는가? 내 인생과 나란히 달려가며 나와 동행하는 친구, 나를 붙들어 주는 친구, 나를 적절히 안내해 주는 친구를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대개 사람은 평생 두세 명 정도 되는 친구와 친밀한 우정을 유지하며 산다고 한다. 친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서로를 알아주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말도 할 수 있고, 약점도 이해해 준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평생 재산이다.
우리 중에도 남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한다.
1)
좋은 친구는 큰 재산이다. 여느 재산 부럽지 않다. 요한복음은 두 친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빌립과 나다나엘이다. 나다나엘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다리를 놓은 사람이 친구 빌립이다.
본문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이 처음 제자를 부르시는 과정이다. 요한복음은 4일동안 일어난 ‘만남’을 공감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관계의 고리처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안드레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를 통해 형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해 고향 사람 빌립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리고 빌립은 적극적으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였다.
아마 그들이 공감한 것은 한 지역 출신이고, 같은 직업을 가졌고, 또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드레, 베드로, 빌립 모두 어촌 벳새다 사람들이다. 고향 사람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고 하는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
본문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기의 특별한 경험을 전도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바로 ‘그 분’을 우리가 만났다고 하였다.
나다나엘의 반응에는 편견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
사실 나사렛은 너무 작은 곳이어서 구약성경에도, 초기 유대교 문헌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빌립이 자신있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사실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평소 공감한 바가 적으면, 빌립처럼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유로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 그만큼 나다나엘은 무엇인가 진리에 목이 말랐다. 요즘처럼 따지고, 재는 것이 많은 세상에 남을 전도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럴 때 누군가 내 길눈이가 되어 주는 일은 얼마나 고마운가? ‘갈 지’(之)자로 흔들리는 내 삶을 붙잡아 주는 친구는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는 내 삶의 한복판에서 종종 길을 잃는다.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수한다. 그러기에 더 서로 돕고, 사랑하며, 공감하며 살아야 한다.
2)
예수님은 빌립이 데려온 나다나엘을 한눈에 알아보신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처음 보는 사람에게 과한 칭찬이다. 간사하지 않다는 것은 남을 속이거나, 이용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몸 안에는 거짓의 뼈가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상 야곱이다. 조상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과 외삼촌 라반을 속인 가장 간사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가장 먼저 이스라엘로 불린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이여, 나를 디스리소서”(폰 라트), 곧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새로운 인간상이다.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너는 간사함이 없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하신다. 나다나엘에게 이만한 칭찬이 또 어디 있는가? 그래서 나다나엘이 물었다. 무슨 근거로, 어떻게 나를 아시고 그런 칭찬을 하십니까?
시편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내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내 형체가, 내 형질이 지어지기 전부터 나를 아신다고 고백한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모태의 때는 하나님의 생명체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시간이다. 그 당시 기억을 가진 인간은 아무도 없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아시는 분,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모태의 사건은 잊어버려도 괜찮은 기억이 아니다. 태교(胎敎)는 최초의 자녀교육이고, 공감 훈련이다. 갓난 아기에게도 공감 능력이 있다. 태어난 지 하루 이틀 된 아기도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같이 따라 운다. 이를 초보적 공감이라고 한다. 아기가 두 살 정도가 되면 남의 아픔에 대해 ‘호-’ 하고 불어 주거나, 안아주는 일로 발전한다.
성인이 되면 공감의 능력이 더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다. 과연 그런가? 중요한 역할이 있다.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는 바로 부모이다.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공감의 능력이 점점 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공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손해 볼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행여 남의 아픔을 동정하더라도 감정이입 차원의 공감에는 인색하다.
신영복 교수는 <처음처럼>이란 책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했다. 사실 그만큼 ‘공감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나와 늘 공감하시되, 죄인의 모습까지도 이해하시는 분이다.
3)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이미 속속들이 아셨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를 부르기 전에 나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다.
주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이미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고 대답하셨다. 그 동네에 오신 지 며칠 안 되신 예수님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면, 아마 나다나엘은 습관적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지자 미가와 선지자 스가랴는 ‘그날’이 오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회복된 백성이 모여들고, 거기서 평화롭게 살 것임을 예언하였다.
무화과나무를 찾은 나다나엘은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을 찾으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꿰뚫어 보시자 나다나엘은 비로소 고백한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나다나엘은 스스로 깨달았다. 나를 알아주는 분이 여기 계시는구나. 내 꿈, 내 기도, 내 갈망을 알아주시는 분, 이 분이야말로 내 영혼의 탄식을 알아주실 메시야이심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해서 놀라느냐? 그 정도는 약과이고, “이 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50)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보다 더 큰 일’은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
도망자 야곱은 하란으로 피난 가는 길에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가 꿈속에서 하늘로 통하는 사닥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장면을 보았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야곱 이야기와 연결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와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늘나라로 인도할 사다리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구원의 계단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 주님은 ‘땅에 이르는 계단’이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주님은 ‘하늘에 오르는 계단’이 되신다.
재작년에 아르메니아를 방문했을 때, 나다나엘 이야기를 들었다. 아르메니아는 주후 301년, 세계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인데 이곳에 첫 복음전도자로 바르톨로메오를 꼽는다. 그가 바로 나다나엘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처럼 진리를 찾는 사람을 부르신다. 그들은 스티브 잡스가 원하는 인물상처럼, “항상 갈망하고 항상 무모한”(Stay hungly stay foolish) 사람들이었다.
옛날 그리스인 어부들은 이렇게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나의 배는 너무나 작고 바다는 너무나 큽니다.”
고향 벳새다 어부들도 같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잘 모른다. 그런데 주님에게 내 삶의 기준을 맞추면, 내가 주님의 마음과 공감하면, 나는 자기 자신을 잘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삶은 마치 조각배를 타고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탄 인생의 배는 얼마나 작은데, 그러나 내가 그 배에 실어야 할 욕망은 얼마나 큰가? 우리의 배는 큰 바다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가? 종종 우리의 그물로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도 얼마나 힘이 드는가?
복음서는 말한다. 예수님은 나를 아시는 분이다. 발을 씻겨 주시는 선생님, 종에게 시중을 드는 주인,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은 의인, 바로 나를 알아주시는 나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 하늘의 평화와 땅의 평화의 차이를 일치시키려고 오셨다. 이런 주님의 제자가 되면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든든할까?
우리 말로 ‘시간’이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신약성서에서 시간을 뜻하는 단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가지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말해주는, 측정 가능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본문의 ‘이튿날’과 같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만약 우리의 시간이 크로노스가 전부라면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기고, 모든 스케줄은 짐이 된다.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었으며, 날마다 분주한 삶은 번번이 녹초가 된다. 어제는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반복되는 시간은 종종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다나엘도 그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흔들리는 자전거 타기와 같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르다. 살면서 이런 말 한두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나에게 운명적인 순간이었어” 이런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가치와 의미’로 정의되는 시간이다. 사랑에 빠질 때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때 시간은 여느 시간과 결코 똑같지 않다. 엄마가 산고 끝에 아기를 낳고 처음 가슴에 안았을 때, 그 짧은 몇 초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에른스트 푹스는 카이로스를 가리켜 “사랑과 진리되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 사랑의 시간, 그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라 하였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보면 그분의 모든 시간이 카이로스였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매 순간을 새롭게 하는 시간, 사랑하는 시간, 살리는 시간으로 사셨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머물던 시간은 바로 그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모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의 시간은 소비하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삶을 연주하는 카이로스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 ‘크로노스’를 넘어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 가운데로 건져 올려진 시간이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평가해 본다. ‘그 사람, 아무’는 어땠나?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았던 사람인가? 아니면 하루와 평생, 그 은총의 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었나? 과연 나는 창조세계를 연주하며 ‘작은 창조자’(c-minor)로 살고 있는가?
그러므로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소중히 여긴다면 주님의 시간과 접목하라.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라. 코앞의 문제까지 어울려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어울려 내 삶을 연주하라.
늘 주님과 동행하라. 그리고 그 사랑의 공감대를 점점 확장시켜 나가라.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 그 은혜로 산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내게 예수님의 공감하시는 사랑이 언제나 같이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