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고수와의 디너타임
“시청자도 동문도 원하는 건 착한 드라마”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1호(2017. 12. 9)
이장수(30회) 로고스필름 대표
‘동문
고수와의 디너타임’11회는방송계편이다.
총동창회가 초청한 동문고수는 30회
이장수 로고스필름 대표이다.
이동문은 1992년 출세작인 ‘금잔화’를 비롯해 SBS에서
‘모래 위의 욕망’(1992년), ‘도깨비가 간다’ (1994년),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 ‘곰탕’(1996년), ‘아름다운 그녀’(1997년) 등 히트작들을 연출했다.
40대이상의 40회대이하의 동문들에게만 기억되는 그가 아니다.
참석자: 이장수(30회) 로고스필름 대표
김대중(30회) 프로덕션 Happy New Ear 대표/감독
진영준(34회) SBS제작기술팀 부장/녹음, 음향감독
· 진행·정리: 배성민(44회, 머니투데이 기자)
· 사진촬영: 김신기(54회) MECEIN대표(총동창회편집위원)
· 일시: 2017. 11. 29. 저녁7시
· 장소: 브루스리(논현동소재)
이장수(30회) 동문이라면 ‘글쎄 누구지’라고 고개를 갸웃할 사람도 그의 연출작들을 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아름다운 날들’(2001년), ‘별을 쏘다’(2002년), ‘천국의 계단’(2003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004년), ‘러브스토리 인 하바드’(2004년), 가장 최근 연출작인 ‘로드넘버원’(2010년)까지 2000년대 이후로도 주옥 같은
드라마들을 쏟아냈다. 배우 이덕화를 비롯해 황신혜, 고현정, 전도연, 손지창, 정우성, 이병헌부터 최지우, 권상우, 하지원, 황정음까지 그의 드라마는 스타의 산실이었다.
직접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대표로 재직 중인 로고스필름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넝쿨당, 2012년), ‘내 마음이 들리니’(2011년), ‘굿닥터’(2013년) 등을 제작했고 현재도 매해 여러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넝쿨당은 일본ㆍ중국ㆍ대만ㆍ태국ㆍ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 판매됐고 ‘굿닥터’는 현재 원안이 수출돼 미국 드라마로도 제작돼 전세계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동문과 그와 드라마작업을
함께했던 김대중 동문(음악감독, 30회), 진영준 동문(음향감독, 34회)을 만났다.
2대째PD.“방송반 시절 먹었던 자장면 잊지 못해”
이장수동문은
모교 방송반에서 PD로 활약했다고 한만큼 40년이상 프로듀서 역할을 한 셈이다. 정확히는 동아방송에서
재직했던 그의 아버지 경력까지 합친다면 2대에 걸쳐 60~70년간 방송현장을 지켜보고 호흡을 함께했던 셈이다.
+경희궁세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교얘기를 들려주신다면요. PD를 선택하신 계기를 학창시절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본래 아버지께서 동아방송 PD셨어요. 아버지의 대표작은 모교동문이기도 한 이장희DJ가 진행했던 심야음악 프로였다고 들었어요. 그 영향이었는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나도 방송반PD로 일했어요. 1학년 때는 학교 여러 소식을 전하는 뉴스PD, 2학년 때는 드라마PD로 톨스토이의 작품을 방송으로 옮겨서 동문들에게 들려줬죠.
(곁에 있던 동기 김대중 동문을 가리키며) 학교축제가 있으면 대중이는 공연을 했고 나는 방송제를 맡았죠. 축제나 서클 일이 끝나면 식권을 줘서 우동,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도 야구부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친구들도 기억나나요?
“동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단연 모교야구부의 야구였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것 같아요.
후배들도 당연히 그렇겠지만 자부심을 이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시험을 쳐서 들어온 세대는 아니지만 공동학군제 때문에 서울 각지에서 친구들이 들어왔고 서울고를 배정받으면 무척 자랑스러워 하던 시절이었어요. 선생님들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고.”
+요새도 우승을 자주 하지만 역시 야구 얘기는 빼놓을 수가 없네요. 당시 유명했던 모교동문 선수들은 누가 있었나요?
“장훈(재일교포 야구선수가 아닌 모교출신 장훈이다)이 우리 동기였던가. 서재진이라는 선수하고 이상학이라는 선수도 있었고요. 우리 때는 선우대영선수가 최고였지. 요새 그 선수는 뭐 하나 몰라요. 서울고가 80년대에는 우승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몇 년간 잠잠하다 최근 몇 년간은 성적이 아주 좋았던 걸로 알아요.”
모교
선생님들처럼 솔선수범..작사가 이장수는 ‘일에
미친
감독’
+기억나는 은사님들은 어떤 분이신가요?
“학교 다닐 때 무서웠던 선생님이 기억이 나더라고요. 김덕량 선생님이라고 연세가 있으신 체육선생님이셨는데 잘 뛰고 건강하셨죠. 학생들에게 뛰기를 지시하면 항상 같이 뛰셨고. 그때 학교는 신문로에 있었지만 단축마라톤을 할 때는 말죽거리 허허벌판에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야구부, 밴드부, 방송부 등 서클활동, 운동하는 친구들이 다양하게 있었어요. 아! 참 김광진선생님이라고 음악선생님도 기억나네요. 그분은 모교 합창제에서 자주 불리는‘ 청산에 살리라’를 편곡하셨다고 들었네요.”
PD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지시도 하지만 스스로 작업을 이끌어나가는 솔선수범이 필요한 직업이다. 히트작 제조기 이장수동문의 솔선수범에는 모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MBC에 PD로
입사하셨다 SBS로 옮기셨습니다. 직장 초년병 생활은 어떠셨나요?
“초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새벽에 하는 영어회화프로도 맡고 그랬어요. 야외촬영을 나갈 때는 현장을 통째로 맡기도 했구요. MBC에서는 또 다른 기억이 있네요. 1988년 한국노랫말대상 시상식서 아름다운 노랫말상을 받았는데요. 제가 조연출을 맡았던 드라마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산울림밴드가 부른‘꼬마야’)를 쓴 적이 있어요.
‘꼬마야 꽃신 신고 강가에나 나가보렴/ 오늘밤엔 민들레 달빛 춤출 텐데/ 너는 들리니 바람에 묻어오는/고향 빛 노래 소리 그건 아마도/불빛처럼 이쁜 마음일 꺼야’ 그 노래죠.”
+SBS로는 어떻게 옮기시게 된 건가요?
“당시 모교동문 윤세영 선배님이 방송사를 새로 세운 서울방송이 생겼죠. 입봉(드라마 연출 데뷔)은 그곳에서 했어요. 윤회장이 있었지만 동문이나 서울고 졸업생이라는 인식은 별로 없었지요. 특히 혼자 작업할 때가 많은 PD생활하면서는
별로였는데. 사실 SBS에는 총무국 인사부장 등을 지내셨던 김재백 선배도 있었어요. 주일청 선배도 계셨지만. 선배들한테 인사 잘하라는 말 정도 들었달까. 하지만 업무적으로 엮이지 않아도 왠지 든든한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었어요. 물론 자연스럽게 모교출신 연기자나 스태프후배들도 봐주게 되지 않더라구요. 아! 모교 50주년행사에서
제가 영상제작을 맡았던 기억이 있네요.”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던 드라마PD시절 일화를 들려주신다면요.
“그때 스크린에서만 활동하던 정우성을 TV로 끌어들여 1995년 찍은 드라마가 ‘아스팔트사나이’ 였어요. 시청률40%를 넘나들며 고공행진 했는데 지금처럼 사전제작이 이뤄지던 시절이 아니어서 항상 막바지편집이 문제였어요. 당시 SBS에서는 신생방송사라
비싼 기자재를 많이 들여놓은 상태라 시설관리측면에서
편집이나 연출작업과정에서는
밤샘이나 작업실 심야근무를 막아놓고 있었어요. 하지만 방영을 앞두고서는 편집도 중요해서 심야라도 1분1초가 아까웠죠. 자연히 야전침대를 편집실에 갖다 놓고 밤샘작업을 하기 일쑤였어요. 눈을 비비며 새벽에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기 위해 나왔을 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당시 SBS사장님과 복도에서 마주쳤어요.
‘아차’ 싶었지만 어색하게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불호령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했어요. 며칠 뒤 조용히 막바지 작업을 하던 중에 당시 고위간부가 나를 사무실로 호출하는 거에요. ‘야 너 거지새끼야. 왜 자지 말라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자고 난리야. 사장님도 보셨지만 이번만은 눈감아주신대’ 하면서 하얀 봉투를 건네주신 거죠.
사무실로 돌아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열어보니 현금300만원이 들어있었어요. 당시로 치면 엄청 큰돈이었어요. 스태프들에게도
선심 쓸 수 있었고 회식도 거하게 해서 다들 힘들이 났는지 ‘아스팔트사나이’는 더 큰 대박을 쳤어요.
“현장 떠나고 싶지 않아”..‘미니밴으로 총총’ 이장수 “레디
액션” 영원히 꿈꿔
+신선한 얼굴이 필요하셨는지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 동기 분들을 출연시킨 적도 있으시다면요?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는 동기인 음악감독 김대중 동문이 주인공인 최지우의 직장상사로도
출연했어요. 최지우가 ‘띨장님’이라고 불렀던 권상우실장 밑의 부장역할인데요. 실제로‘ 천국의 계단’은 국내시청률이 50%를 넘었고,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될 당시 최고인 13%를 찍었어요. 드라마 방영 후 출연배우 권상우는 한류스타로 발돋움했고 대중이도 그 뒤로 ‘천국의 계단’보고 일본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동문은 2004년부터 로고스필름을
이끌고 있다. 방송사에 소속돼 있던 것과는 큰 차이다.로고스필름에서는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그대,웃어요', '천상의 화원 곰배령',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을 제작했다.
+왜 연출현장을 떠나시게 됐나요?
“몇 년 전부터인가 체력과 능력이 예전 같지 않더라구요. 맘 같아서는 일년에 한 편이상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연출을 직접 하면 2~3년에 한 편하기도 쉽지 않아요. 촬영현장에서
배우, 스태프들과 부대끼고 몸 쓰는 것도 쉽지 않고. 근데 제작사에서는
1년에 3~4편은 너끈히 만들어요. 한마디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싶은 애틋함 이랄까.”
+선배님 드라마는 착한 드라마라는 특징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넝쿨당과 굿 닥터가 안방극장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착한 드라마'라는 점 때문이었을 거에요. 막장드라마 시청률이 반짝 인기를 끌지만 시청자들은 이제 착한 드라마를 오래 기억하고 원해요. '막장 드라마'가 난무하는 속에 시청자들이 서서히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거죠. 착한 드라마 때문인지 상복도 있었네요.
2011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코리아드라마 어워즈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드라마작품상을
받았고요. 2017년만해도 대통령표창과 코리아드라마 어워즈 프로듀서상을 수상했어요.
+영화연출도 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다음 계획은 어떠신가요?
“영화감독 이장호 선배님 아시죠. 그 선배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영화를 감독하셨는데 그 영화 원작을 안요한 목사님이 썼어요. 근데 최근에 속편 격에 해당하는 책을 쓰셨다고 해요. 2편을 이장호 선배님께도 여쭤보고 상의 드려서 한번 연출해볼 생각도 갖고 있어요.
식사 중간 중간에도 끊임없이 제작사대표 이장수동문을
찾는 휴대전화가 울려댔다.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웃기도 하면서 통화내용은 온통 작품이야기였다. 미안합니다 라고 다시 돌아와서 식당의자에 앉을 때면 흐뭇한 미소가 배어있었다.
동문들과의 즐거운 만남과 식사를 마친 그는 총총히 자신의 미니밴을 타고 떠났다. 히트드라마 제작사대표로
어울리는 중대형 세단이 아니었다. 촬영현장에 도착한 이장수 PD가 미니밴에서 내리며 “야! 조감독, 현장준비 됐어. 카메라, 조명, 음향. 자 찍어보자고. 레디 액션!”이라고 당장이라도 외칠 것 같았다. 오늘밤 동문들은 어느 곳 채널에선가 화면에 빠져들며 그의 손때 묻은 영상과 드라마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