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연재 칼럼 15 (2024년 11월)
감동
음악은 악보에도 음반에도 유에스비에도 없다. 음정과 박자에도 없고 어떤 이론적 약속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음정과 박자와 화음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이들은 소통을 위한 필수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치게 이들에게 얽혀 들어 구속 받지 말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당신의 내부에 있다. 그러므로 음악이란, 시란, 세상의 모든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파 먹는 작업에 다름이 아니다. 이 무슨 횡설수설이냐고? 형식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표현되어야 할 감동이 변질되거나,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말이다. 모든 예술은 결국 형식만 남는 거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비록 순간의 진정성일지라도 진정성에 감동을 받지, 형식에 감동 받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잘 다듬어지거나 새로운 형식에 몰입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예술의 정체성은 단 하나, 내면에 사는 정신, 감정, 정서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움직이게 할 때 그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국어를 좀 섞어 말한다면 모든 예술의 그 존재 가치는 향유하는 자의 무빙마인드moving mind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주변인
중독성에 이끌려 자꾸 보게 되는 티브이 프로는 <세계테마기행>, <동물의 왕국>, <격투기 중계>와 몇몇 외국의 다큐 프로들이다. 결코, 가 볼 자신이 없으므로 티브이로 대리 만족하는 걸지도 모른다. 요즘 가능하면 뉴스 프로나 정치 프로는 보지 않는다. 보수 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철면피한 얼굴과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뻔뻔한 얼굴을 점점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땅에 진(眞)보수나 진(眞)진보가 있다고 믿지 않은지 오래다. 물론, 이는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다.
나는 자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인도 아니고 그저 서울에서 집값이 제일 싼 변두리에서 사십 년 째 사는, 노년으로 들어서고 있는, 정년 몇 년 앞두고 명예 퇴직한 사내이다. 그렇다고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전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어르신 카드가 있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 카드는 소리가 '찍'하고 한번 나고 노인 카드는 "찍찍' 두 번 나는데 이 두 번의 소리가 꼭 '꽁짜'라고 질타하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중년도 노년도 아니다. 그렇다고 티브이 프로에 나오는 자연인도 아니고 도시인도 아니다. 나는 그저 티브이와 유튜브 검색에 중독된 늙어가는 주변인일 뿐이다.
마현리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 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정약용을 다시 꺼내 읽으며 오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당시로는 천수인 73세까지 장수했다는 이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요즘 부쩍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의 부고가 들려 오기 때문일까? 다산 정약용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실학의 대가였으며 대 문필가였고, 학문과 이론을 실천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생가가 있던 곳 근처에 다산 기념관이 있고(마현리), 그 주위에 넓은 연근 밭이 있어서 가을이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자연산 연근을 구매해서 가까운 지인들과 조금씩 나눠 먹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일 년 동안 신세 진 이들에게 내가 보답하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연근 캘 인력을 구하기 힘들어 연근 생산을 중단했다는 말도 들린다.
* 임금의 스승이기도 했던 대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서른아홉 살이던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 18년을 견딘 후 쉰 일곱 살이던 1818년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 마현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지금 그곳에 다산 기념관이 있다.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 도착했을 때 강진 사람들이 보인 행동을 역사는 '파문괴장破門壞墻'으로 증언한다. 이 말은 서학쟁이가 나타나자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달아났다'는 뜻이고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하게 한/천주학의 수괴" (곽재구, <귤동리 일박> 부분) 일 뿐이었다 (중앙일보 2023년 1월 27일 금요일자에서 일부 발췌)
양평 가는 길목
양평 가는 길목에 있던/ <개성만두집>이 <투썸플레이스>로/ 몸을 바꿨고/ 개성만두를 사 주시던/ 황명걸 시인께서는 돌아가셨다/ 늘 그리워하던 시인의 고향/ 평양으로 가시진 못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마음 한켠이 쓸쓸해지곤 해서/ <개성만두집>만큼 오래된/ 고인의 시집 <한국의 아이>를 다시 읽었다
양수리 가는 길목/ 마현리 정약용 생가 근처/ 연근 밭은 올해도 연근을 캐지 않는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다/ 이맘때면 연근을 사서/ 한 해 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우송해주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양수대교 건너기 직전/ 돌미나리밭 주인은/ 미나리 전집을 내서 대박 난 후/ 물려받은 돌미나리 농사는 짓지 않고/ 서울 경동 시장에서 사 온다고 한다/ 맛이 예전 같지 않아/ 돌미나리 좋아하던 사람들과/ 함께 사 먹으러 가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젊었을 때부터/ 그곳 풍광에 매료된 난/ 몇 번이나 그 근처에 집을 짓고 살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늙기만 했다/ 핑계는 병원 옵션을 대고 있지만/ 전원주택을 관리하며 살 자신이 없어서이다/ 다만 그곳과 인연이 깊어/ 스물여덟, 나의 첫 학교 부임지가/ 양평이었고/ 요즘은 두물머리 근처/ 이 나라의 밴드 음악의 전설인/ 팔순의 원로 기타리스트 스튜디오에/ 공부하듯 놀러 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