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 콜베수도원성당 미사
▷ 침묵의 비
▷ 시츠성당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기념관, 혼고우지성당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며 순교자, 성인으로 속명은 라이문트 콜베(Rajmund Kolbe).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제.
가톨릭과 성공회, 루터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며 축일은 8월 14일이다.
기자, 정치범,아마추어 무선 (HAM), 약물중독자, 가족, 낙태 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며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의 선각자.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천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다른 사람 대신 죽기를 청해 순교.
혼고우지 성당
1930년 나가사키에 도착한 콜베 신부는
1931년 혼고우치 히코산 기슭에 '원죄 없으신 성모원'이라 부르는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6년 동안 청빈을 지키며 선교(나가이 다카시 박사 세례)와 교육을 하고,
결핵으로 1936년 폴란드로 귀국한 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성콜베 기념관
콜베 사제는 1930년부터 나가사키에서 약 6년간 일본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생 교육, 가난한 이들 구호를 비롯해 현 히코야마 중턱인 혼고우치에 성모의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기념관은 1971년 콜베신부 복자품을 기념해 지어졌고, 그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신부는,
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 1914년 유학간 로마에서 종신서원,
마리아 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1915년 로마의 신학교인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리메이슨의 반교황 캠페인에 대항해 6명의 동료 수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콜베 수사와 그의 동료 수사들은 교리문답과 짧은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를 출간하면서
언론인의 수호성인의 근거가 되었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6년간 머물렀다.
일본에 가는 도중 부산에도 잠깐 들렀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Niepokalanów)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939년 폴란드가 독일 나치에 점령되며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이에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도 체포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소장은 네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퇴회한 前 수도자의 명의로 제출된 것이었지만,
게슈타포가 쓴 독일어 고소장에 독일어를 읽을 수도 없는
전 수도자를 협박해 사인만 한 것이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죄수 번호 16670번으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 ~ 1945)는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내 그들을 아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
(Franciszek Gajowniczek, 1901.11.15.~1995.3.13.)라는 사람이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신부입니다.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라 청하였고 프리치는 이를 승락했다.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콜베 신부는 지하감방에서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페놀을 주사해 살해하였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살아남았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다.
시복식(1971년 10월 10일)과 시성식(1982년 10월 10일)에도 참여했다.
엔도슈사쿠 遠藤周作(원등주작)의 '침묵'의 비(沈默の碑)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人間はこのように悲しいが 海があまりにも青いです
엔도 슈샤꾸(1923~1996)는 가톨릭 신자이고 신앙적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그의 '침묵'(沈默)은 참 많은 질문을 주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박해 때문에 배교하는 사제의 이야기는 그 후 재미 한인소설가 김은국(金恩國 리처드 김)의
'순교자(殉敎者 Martyr)'와 함께 극한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킬수 있는 것인지,
하느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깊은 도전을 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배경이 된 일본 나가사키의 바닷가에 엔도 슈샤꾸 문학관이 있고
침묵의 비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엔도 슈샤꾸가 쓴 한구절이 있군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시츠성당
1865년 3월 “신자 발견” (오우라천주당)뒤, 프티쟝(Bernard Thadée Petitjean) 신부는
9월에 소토메(外海)를 찾아와 신자들을 만났다.
그리스도교 금령이 풀린 뒤
시츠(出津)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한 페뤼(Albert Charles Arsène Pélu)신부에 이어
1879년 소토메에 부임한 드로 신부 (Marc Marie de Rotz, 1840-1914)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앙 생활의 거점이 되는 시츠(出津)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박해를 딛고 신앙을 되찾은 소토메 신자들을 위해 지은 이 성당은
오로지 실용성에 중점을 둬 건축비용을 최소화했다.
드로 신부는 사비를 들여 소토메 마을에서 잘 보이는
약간 높은 산비탈 땅을 산 뒤 직접 설계하고 시공을 했다.
신자들은 동네 단위로 번갈아 가면서 노동 봉사를 하면서
신앙의 터전인 성당을 지어나갔다.
(산에서 베어 낸 목재를 운반하거나 바닷길로 실어온 벽돌을 해변에서 옮기는 일)
계단식 밭 한가운데에 착공한 시츠성당은 이듬해인 1882년
벽돌에 회반죽을 바른 아름다운 성당으로 완공되었다.
1891년과 1909년에 증∙개축을 함으로써 두 개 종탑을 갖춘 독특한 외관을 지니게 되었다.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성당은 견고한 외관에
아치형 입구와 창틀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하고 있으며
성당 내부는 단순하지만 제대부분을 반원형 평면으로 지어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바람이 센 소토메(外海)지방의 기후를 고려해서 지붕을 낮게 만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