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성지 살펴보다.
답사일:2011.4.5.
촬영.편집/죽암 장석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나루터에 한강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절두산(切頭山)이 있다.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이기에 寒食 전날인
淸明 날 경근한 마음으로 거닐며 이곳에 흘린 순교자들의 핏자국을 살펴 보았다.
※ 병인양요(丙寅洋擾)란 1866년1월 초 흥선 대원군(이하응=고종황제의 아버지)이 쇄국양이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한 사건이다.
이 절두산은 누에가 머리를 쳐드는 형상이라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했는데, 병인양요 이후부터 뭇 천주교도
들의 머리를 잘랐다하여 언제부터인가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고 있다.
▲ 옛날에는 절두산을 잠두봉(蠶頭峰)이라 했다고 함.
▲ 절두산 기슭
▲ 절두산 기슭의 조형물.
▲ 절두산 순교성지성당으로 가는 길섶의 조형물들.
切頭山 殉敎聖址入口의 조형물.
▲ 절두산순교성지성당.
▲ 병인순교100주년기념 박물관(내부 촬영불가)
※ 성당으로 올라가는 사립문.
▲ 촛불기도소.
△ 聖 金大建神父 像
△ 안드레아 김대건신부의 약력.
※ 안드레아 김대건신부의 약력.
복자 김건대 안드레아 신부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외국에 유학하여 서양의 학술과 사상을
받아들여 어둠에 잠겨 있던 조국을 근대화하려는 일에 앞장을 섰던 위대한 성직자이며 애국자이다.
김 신부는 1821년8월21일 충청도 대포에서 양반제급인 김제준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
하고 용감했던 그는 16세 때(1836년) 몰래 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뽑혀 다른 두 소년과 함께 멀
리 마카오로 가서 신학 철학 등 서양 학문을 배우고 릴리핀, 대만, 홍콩, 난징, 만주를거쳐 9년만에 한
때 귀국한 일이 있었으나 다시 샹하이로 건너가 1845년8월17일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페레올 주교 다물뤼 신부를 모시고 다시 풍랑의 바닷길을 거쳐 귀국하여 사랑과 정의의
복음을 펴는 한편 중국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이듬해 5월에 백렬도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던길에 잡혀 서울 새남터에서 9월16일 순교했다.
그는 1925년7월5일 로마 교황으로 부터 목자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
△ 주는 찬미를 받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절두산 기슭에서 바라본 양화철교와 양화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