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ː2023년 07월 19일(수)
▶산행지ː 삼봉(276.5m) 갈미봉(275m) 수용골산(225m) 백중산(180.6m) 충북 충주
▶코 스ː 마애불입구-굴다리-수용골산-삼봉-임도-갈미봉-도로-백중산-농장-창동리오층석탑·약사여래불·마애불
▶난이도ː B+
▶누구랑ː부산한마음산악회
▶시 간ː11:57∼15:10(휴식.목욕 포함 03ː13분)
▶거 리ː약 7.52㎞/ (오르내림포함 약 7.95km)
▶날 씨ː흐림(구름조금/ 미세먼지 비조금)
☞마애불입구(원점회귀)ː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39-7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 _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 (忠州 倉洞里 磨崖如來像)
수 량 : 1구
지정일 : 1980.11.13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40
충북 충주시 가금면에 있으며 자연 암벽 위에 얕은 선으로 새겨진 마애불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서 있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양 어깨에 걸친 옷에는
3가닥의 선으로 새긴 것과 더불어 구불구불한 선으로 새긴 특이한 형태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토속적인 분위기와 세련되지 못한 세부 표현, 하체 조각이 생략된 기법, 구불구불한 선 모양 등
이 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독특한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창동리 노천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화강암) 약사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원래 청금산장 인근의
폐광에서 발견되어 197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원위치는 창동사지로 짐작되는 곳이다. 절터에는 자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주초석 등이
남아 있었고 5층석탑도 조성되어 있었는데, 5층석탑은 이 불상과 함께 현재의 자리로 함께 이전되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호리병 모양의 광배 안에 얕은 부조로 조각된 이 불상은 왼손에 약함으로 보이는 지물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판단된다. 육계는 옆으로 넓고 크며, 둥근 윤곽의 얼굴은 전체 신체에 비해 매우 크다. 부조 자체는 깊지 않으나, 안면부의 양감을 비교적 풍부하게 처리하여 부처의 미소가 완연하게 드러난다. 목이 매우 짧고 얼굴에 비해 짤막한 키이지만, 두툼한 인체의 양감 묘사는 이 불상을 친근하면서도 제법 당당
하게 보이게 한다. 양 어깨를 덮은 착의법을 보이며, 오른손은 설법의 수인(手印)을 결하고 있다. 가슴에서 아래로 늘어지는 옷주름은 간략하면서도
큼직한 선으로 처리되었고, 왼손 팔뚝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사자락이 매우 강조되어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불화의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탄금대
탄금대: 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 1-1번지에 소재하며 명승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이
멸망한 나라인 가야국을 떠나 신라에 정착하였는데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이 작은 산의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고 하여 탄금대(彈琴臺)로 불리웠다고 한다.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大門山)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또한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도순변사이던
신립(申砬)은 8,000명의 군사와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와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물밀듯이 몰려오는 왜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이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나라를 잃고 정복국의 신민이 되어 변방에 올수 밖에 없었던 우륵의 한서린 가야금 소리와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최후의 결전의 벌였던
신립장군의 함성이 오늘도 남한강 소용돌이에 묻혀 흐르고 있다.
♣.젊은이가 사라진 마을.♣
이 마을에서 젊은이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
이제 막 시작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지만, 평화로운 시대에 젊은이의
모습이 사라지는 현실은 전쟁통에
사라지는 것보다
더 무자비하게 여겨졌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첫댓글 대단하심 우린 백중산은포기 해심 수고많아서요
습하고더운날씨에 정말수고많으셨습니다^^ 사진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