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ㅡㅡㅡ가을비 오는 오후 애주가로
황산에 올라 낙락장송과 몽필생화를 보며 이태백과 두보를 생각하다!
2015년 10월 21일 난징남역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반 만에 황산풍경구 탕커우(黄山风景区
汤口) 에 내려서... 다시 운곡사행 씬꿔센 버스를 타고 구절양장 산을 올라 1시간 만에
운곡사에 도착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올라 험한 산길을 한시간 가량
걸어서 시신봉을 지나 북해에서 몽필생화를 본후 고개를 넘어서 거대한 낙락장송에 이릅니다.
1.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
본명은 이백(李白). 태백(太白)은 그의 자를 가리키는데.... 李白斗酒詩百篇,長安市上酒家眠。天子
呼来不上船,自稱臣是酒中仙。“이백은 술 한 말을 마시고 시 100편을 짓고, 장안성 저자의 술집
에서 잤다. 천자가 오라하여도 배에 오르지 않 채, 스스로 칭하기를 '신은 술의 신선입니다' 하였다.”
두보(杜甫)와 함께 한시(漢詩) 문학의 양대 거성으로 꼽히는데 두보가 몇 번의 퇴고를 거쳐서
완성된 시를 내놓는 반면에... 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마음 내킬 때 몇 줄 내려쓰면
그게 두보에 필적하는 명시였으니, 별명은 두보의 시성(詩聖)과 대비되는 시선(詩仙)
으로 둘을 묶어 보통 '이두(李杜)' 라고 부르며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건 어렵다고 합니다.
이백의 출생은 간쑤성 칭양시이며 3살이 되기 전에 사천(쓰촨) 으로 이주했다는데.....
었을 때는 검술을 배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사람을 여럿 살해하고 다녔다가
20살에 개과천선했다고 하며..... 그의 시가 신선(神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 인데 25살 때는 강남 일대를 유람하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술도 배우고 다녔다고 하는데 37살 때는 5명의 시인(공소보(孔巢父), 배정(裵政),
한준(韓準),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 과 함께 죽림에 은거하여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시가 너무 유명해져서 도피 겸, 여행을 다니다가 장안까지 입성하게 되었는데
시험도 쳤으나 당시 시험관이었던 양국충과 고력사의 의견이 충돌하는 바람에 낙방합니다.
유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시를 쓴 두보와 달리, 그야말로 풍류를 벗하고 풍류를 노래한 인물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역대 중국 왕조를 보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백 보다는 두보를 더 높이
쳐주었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중국 왕조에서 대대로 밀어주었던 두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백의 시가 그와 대등하게 평가받고 있으니 그만큼 시의 천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는 풍류인(風流人) 이백 쪽이 인기가 더 높은데 유교 문화권에 속하기는 해도 풍류를
노래하는 정취가 수많은 선비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으로... 달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반드시 이백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두보에게는 천재적인 시인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컨셉이나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백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강산의 정취를 노래하기 때문에 놀고 즐길 때는 좋으나....
두보의 시는 시사(詩史)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과 풍자를
담고 중국의 고사 비유가 많기 때문에 학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때에 알맞기 때문
인데, 두보는 중국사회의 여러 면면을 살피고 민초들의 생활고에 슬퍼하고 고뇌했습니다.
두보의 시는 완성도가 훌륭했으니 조선에서도 훈민정음으로 발간된 대표적 책 중의 하나가
두시언해였 듯 교훈적인 이유로 두보의 시가 장려되었으며.... 두보의 이미지는 아주
꼿꼿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곧잘 표현되곤 하지만, 두보 본인도 이백에 지지 않을 정도
로 술과 풍류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애당초 둘이 여행도 같이 다닐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이백은 발해 사신의 문서를 해독한 걸로 유명하니 당나라 현종때 발해의 선전포고 서신을 받았는데,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그것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대신 하지장(賀知章)이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이백을 입궁하게 했는데... 황제는 그에게 한림학사의 직함과 관직을
주었고, 이백은 자신의 시험관을 찾아 그들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고는 그 문서를 번역합니다.
이백은 시를 잘 지어 당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술김에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환관 고력사에게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놈아!" 라며 술주정을 부릴 정도로
호방하게 굴었고.... 훗날 이 일을 잊지 않은 누구라도 못 잊을 듯 고력사의 미움을 사서
파면당했고, 그해 여름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 1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여행도 다녔습니다.
두보가 한 말에 의하면 둘은 밤에는 같은 이불에서 잤고, 날이 새자마자 손 잡고 떠났다
고 하는데.... 이백이 두보 보다 12살 연상이었지만 두보가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에 관련한 시가 존재하니 이백이 과거시험에 합격해 한림학사가 된 42살(742년)
에 지은 시로, 무용수의 고구려 춤을 보고 지은 것 같은데....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임을 감안하면, 그 후에도 고구려 문화가 당나라에서도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니 여기서 절풍모는 고구려인들이 자주 썼던 조우관을 말합니다.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노란 꽃 절풍 모자를 쓰고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백마 타고 잠시 멈추어 돌며,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펄럭펄럭 넓은 소매 춤 추니
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새처럼 바다 동쪽에서 왔구나.
애주가들의 표본 같은 인물이기도 하니 술을 뜻하는 한자인 酒(주)자를 앞에 넣어 '주태백' 이라고
하면 술꾼인 사람들, 특히 자주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술고래들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이고.... '주태배기' 라고도 하며 "이백은 달하고 서로 술을 주고 받았다" 는 전설도 있습니다.
56세에 영왕의 군대에 참여하나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영왕이 처형된뒤 귀양을 가다가 삼협도에서 사면
받고 다시 방랑길에 오르고 62세가 되던 해, 종숙이던 이양빙의 집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데 2남 1녀를 두었으나 집안을 돌보지 않고 떠돌기만 한 인생이라, 이백이 죽은지 60년쯤 지난후 어느
관리가 이백의 무덤을 찾은 후 자손을 알아보았는데 농민에게 시집간 손녀 2명만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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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검술의 달인 이백
이백은 유배길에서 이제 죽는구나 싶어 절망했지만.... 옛날에 도와준 바 있는 곽자의가 조정에
구명한 덕분에 유배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방랑을 계속하다가 62세에 죽는데.... 민간 전승
에서는 이때 강에 뛰어든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을 날아 고향인 선계로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이백은 젊어서 부터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여러 사람(부랑배?) 을 칼로 베어 죽였을
만큼 유협 생활을 했던 인물로 무예가 뛰어났으니.... 특히 검술에 능하여 시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검술은 일류 고수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 이었다고 합니다?
이백은 보검 제작으로 유명한 용천 지방을 지날 때에는 차고 있던 용천검을 뽑아 검무를
추고 싶다는 싯구를 썼을 정도로.... 검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깊었다고 합니다.
서양에도 그의 시가 전해졌으니 빈 궁정 오페라극장이며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로 관혁악
의 대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도 그의 시에 반한 듯 한데.... 중국의 시들을 바탕
으로 작곡된 대지의 노래에서 이백의 시가 절반 넘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볼 때
그렇게 생각되는데....... 물론 원문과 대지의 노래의 가사 사이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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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은 외국어에도 능통했는지 발해인의 말을 알아서 발해에서 온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
하기도 했으며 또한 두보와 관계가 깊었는데, 두보가 그에게 많은 시를 선물했지만 그는 감사히
받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만을 써준 일화를 두고 중국인들이 비난하기도 하는데....
2017년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 NTT 도코모의 앵무새 형제 캐릭터 포인코(poinko)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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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부작침(磨斧作針)
이태백은 스승에게 글을 배우다가 공부가 싫어져서 25살 때부터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는데
35살 때는 낙양을 거쳐 태원까지 유람했고, 이때 우연히 명장 곽자의와 안면을 텄다고도
하며 야사에서는 곽자의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자 이백이 구명활동을 벌이고 무죄를
호소하여 풀려났다고 하는데.... 훗날 곽자의가 이백을 살려주려고 한 것은 은혜를 갚은 게 됩니다.
이백은 이런 방랑길 유람 중에 상의산(象宜山) 기슭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는
부러진 도끼를 열심히 갈아 바늘을 만들고 있었으니 그 노파의 모습에서 이백은
포기하지 않으면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깨우쳤고... 다시 마음을 돌이켜
공부했다는 일화가 있으니 여기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합니다.
5. 몽필생화(夢筆生花)
황산에는 이백의 전설이 얽힌 몽필생화(夢筆生花) 가 있으니 그가 꿈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붓을
세운 듯한 바로 그 몽필생화(夢筆生花) 바위인데.... 당나라 시인 이백 (701-762) 은 1,300
여년 전에 황산에 올라.... 기이한 봉우리들을 바라 보다가 그만 시흥이 일어 시 한수를 읊습니다.
“황산 사천길 높이에 서른 두 개의 꽃봉우리여!
빨간 벼랑들 기둥 틈에 금빛 연꽃들아.....“
그러자 이 외침을 들은 황산의 사자림 사찰의 늙은 주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와 보니
흰 옷을 입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선비가 서 있는지라 안으로 청해 들입니다.
동자승에게 오래된 곡주를 가져오게 하니 애주가 이백이 마다할리 없으니 마십니다.
그러고는 흥에 겨워 다시 시 한수를 짓고는 붓을 허공에 휙 던져버리고
하산해 버립니다. 스님이 손을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그새 붓은
바위 봉우리 가 되고 그 붓 끝에서 한송이 소나무가 자라는 것이라???
이백 은 자가 태백 (太白) 으로 두보 (杜甫) 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이자 시선
(詩仙) 이라고 까지 불리는데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는데 쓰촨성 四川省
촉(蜀) 나라의 장밍현 彰明縣 출신으로 25세 때 양쯔강을 따라서 강남,
산동, 산시성을 편력했는데 도교(道敎) 에 심취해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의 시는 도교적 발상 에 의한 것으로 맹호연 (孟浩然) 과 두보 등 많은 시인들과 교류
했는데...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바랐으니,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는 한림공봉 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지만 한낱 궁정 시인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으니 이백은 “술 속의 팔선(八仙) ”
으로 불렸고 결국 궁정을 쫓겨나 낙양에서 두보 와 지기지교를 맺는데... 이후
두보와 헤어진후 하북성을 방랑하고는 다시 남하해 양주(揚州) 와 금릉(金陵: 南京)
에서 노닐다가 55세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안휘 선성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황자 영왕이 거병하자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패하였으므로 그는 구강현의 옥중에 갇히었다가... 그후 곽자의
(郭子義)에 의하여 구명되었으며 이후 난징과 안휘성 선성을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병사하였으니 그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 으로 끝났습니다.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의 방랑은 “대붕(大鵬)의 비상
(飛翔)”이었으니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는데 두보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데 비해 이백은 인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 하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 까지도 안으로 받아들여 그곳으로 부터 비상
하려고 하였으니 그의 시를 지탱하는 것은 "협기(俠氣) 와 신선(神仙) 과 술"
이라! 성실한 인간 "두보의 시가 퇴고" 를 거듭하여 닦아지는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 가 되는 바람 같은 시풍(詩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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