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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22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수도회] 복음적 대조사회의 참 가족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에즈 6,7-8.12ㄴ.14-20
+ 복음 루카 8,19-21
◈ 오늘의 묵상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의아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본당 사제의 가족이 본당 구역 안에 살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사제가 가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당
사목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신자들보다 가족에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신자들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 장애가 되겠지요.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이 아닌 일반 신자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특별히 만나거나 환대하다 보면 다른
신자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신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 2,11)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께 제자를 맡겨 드리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제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고 부모와 자녀를 버리는 이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마르 10,30)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것은 더 큰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을 위해서, 더 많은 이를 형제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9월22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 에즈라기의 말씀입니다. 6,7-8.12ㄴ.14-20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지난 주일에 안양에 있는 ‘아론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동서울 지역
레지아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을 강의하는 것입니다. 도착하니, 단장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부득이 11시 20분까지만 강의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의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강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강의를 듣는 사람이나, 강의를 하는 사람이나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의 주제는 ‘성사론’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부족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표징’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자매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서울근처까지만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서울로 가야하기에 자매님을
모시고 운전을 했습니다. 자매님은 개포동 성당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저는 내비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내비는 자꾸만 서쪽을 향해서 안내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저는 급한 마음에 개포동성당으로
찍지 않고 개봉동 성당으로 찍었던 것입니다. 개포동 성당으로 내비를
조정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니 바로 옆에서 하는 자매님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매님을 개포동 성당에
모셔다 드리고, 명동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좋았습니다. 음악도 들을
수 있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숨은그림찾기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신문에 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그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공, 명에,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그림을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현대인의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으며,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여성에게 '아프리카 이브'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다르든지 간에, 유전자
조사를 통해 인류 가계도를 추적한 결과, 지구상의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작은 호모 사피엔스 집단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70억 현대의 인류는 모두 한 가족임을 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과학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사랑 받는 가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망망대해의 우주에서 지구는 작은
점보다 작습니다. 그 작은 점보다 작은 지구에서 70억 명이 모여 있는
것은 먼지보다 작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을 가르고, 피부와
종교로 가르고, 신념과 계층으로 가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르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우리는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어리석음을
보여 왔습니다.
사제로 지내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불쌍하고 가난해서 도와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꾸루실료를 함께하신
동기 분들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교포 신자 분들이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차량도 마련해 주셨고,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제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안 도현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는 거라네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 것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군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연탄 한 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성소국 직원 연수가 있어서 묵상 글은
26일부터 올릴 것 같습니다.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잖아요.)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신앙인은 천국스타일 형제
자녀라면 부모 말씀 들어야하고 형제들은 서로 화합을 잘 해야 합니다.
직원이라면 사장님 말씀 잘 듣고 그대로 맡은 바 일을 잘 해야 됩니다.
뭐는 안 그런가요? 학생은 선생님을 국민은 대통령을 등 그래야지요.
그런데 고장 난 사람들이 많거든요? 재물 정치 세속의 형제들 말입니다.
이런 관계는 잠시 지나갈 세상스타일이고 천국스타일 형제들도 있지요.
하느님 말씀 듣고 실행하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은 부모 형제라 했잖아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자격 조건
2015년 나해 9월22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 에즈라기의 말씀입니다. 6,7-8.12ㄴ.14-20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여러 가지 신분증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내에 주소를 두고
거주하는 주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이 있으며, 외국을 여행하는
국민에게 정부가 발급하는 것으로 여행자의 국적과 신분을 증명하는
여권(Passport)도 있습니다. 또한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운전면허증도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대한민국 안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여권 없이는 해외를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 없이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신분증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는 것으로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분증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을 취득해야만 가능하지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만으로 그리고 남들이 가지고 있다고 “저도
그냥 하나만 주세요.”라고 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냥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조하는 혈통이나 가족 관계를 통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돈을
주거나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 시민에 걸맞은 자격조건을 갖추어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이 자격조건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보다는 이 세상
안의 시민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도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친족 관계를 특히 강조합니다(우리나라가 더 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이 얼마나
좋을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친족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에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수도자가 우연히 인기 연예인과 함께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기 연예인을
뜨겁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수도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혼자 쓸쓸이 버스를 내리면서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지요.
‘하느님, 저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은 저렇게 많은데 저를 맞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바로 그때 하느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내 집에 온 것이 아니지 않니?’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집이 아닌 이 세상의 집에만
머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 조건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르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웃 사랑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짜 사랑입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것, 내게 얻을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이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조건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사랑 실천은 과연 어떤
수준까지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떠올렸으면 합니다. 자격조건을 채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생각이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생각부터 바꿔라(마크 피셔).
어떤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며, 서로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복의 네 가지 비결(‘좋은 생각’ 중에서)
어느 날, 한 소년이 마을의 현자를 찾아가 말했다.
“저는 꿈이 있어요. 저 자신과 남을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꿈을 갖다니 훌륭하구나. 네 가지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실천해
보렴.”
현자가 “첫째는 자신을 남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라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을 남처럼 생각하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겨도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아주 똑똑하구나. 두 번째는 남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주변 사람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여기고 도와줄 수 있겠네요.
친구가 기쁠 땐 저도 기쁨을 느낄 수 있고요.”
이어서 현자는 얘기했다.
“세 번째는 남을 남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그러자 소년은 바로 답했다.
“주변 사람을 바꾸려 들지 말고 존중하라는 뜻이죠?”
현자는 소년에게 말했다.
“네 번째는 자신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지. 쉬운 듯해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단다. 네 가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거라. 그러면 여러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게야.”
어떻습니까? 행복의 비결이 조금 명쾌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신 행복의 길로 가신 성모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21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마태 9,9)
예수님께서 나를부르시면 막상 "예"하며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같은 보잘것없는 죄인이 어떻게...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맡고있는 일이 많아서...
본당신부님이 이런저런 직책을 좀 맡아라 하면
10에 8-9명은 이런저런 핑게를 댑니다.
단체 임원으로 선출되어도 "나는 못한다"며
수락거부하거나 아예 선거일에 나타나지도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예" 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예" 했으면 임기동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이니까요.
주님께서 나에게 뭔가를 맡기시려 한다면
이런저런 핑게를 대지말고 무조건 "예" 합시다.
그리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봉사합시다.
임기를 마치면 또 하려는 욕심 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도록
내려놓고 물러나 뒤에서 도와주도록 합시다.
그래야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복음적 대조사회의 참 가족
2015년 나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루카 8,19-21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8,21)
복음적 대조사회의 참 가족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 생존하려다 보니 주변의 환경과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혈연, 학연, 지연 등에 의존하면서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習)에 젖어 살아가지요. 이 익숙함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계에 자신을 던진다는 건 큰 모험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익숙함과 습(習)이 하느님의 창조와 기쁨의
새 공동체에 들어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7년까지 나자렛에서 장인(匠人)으로 사시다가 세례를
받으신 다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향하여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말씀에 충실했던
어머니에게까지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의아해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자신을 맡겨
드렸습니다(루카 1,38). 그녀는 자기 아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깊이
되새겼고(2,19), 그 말씀을 엘리사벳에게 전해줌으로써 그 말씀은
풍요로워져 ‘마리아의 노래’(1,46-55)로 흘러넘쳤습니다. 그녀는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인내로써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과 성모님,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소원했고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분의 처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마르 3,21). 몰이해 속에 예수님의 가혹한
말씀을 들었던 가족들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그분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고 있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사도 1,1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 안에서 형성된 영적인
관계가 혈연관계보다 더 우선하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던 구약의 친족법을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의 실행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생활을 생각하지 말고(마태 19,12), 당신보다 가족을
앞세우지도 말며(마태 10,37),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하지 말고
(마태 8,21-22),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하러 가지도 말라고 하셨지요
(루카 9,61-62). 제자들은 그런 요구를 따라(마르 10,28-30)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적 가족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의 참된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 안의 새로운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잘해주는 이들과의 관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 혈연관계를
더 중요시하며 하느님을 뒷자리로 내치고 헛되이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또 말씀을 듣기보다는 내 생각과 주장을 먼저 말하느라 정신을 팔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면서도 실행에는 더딘 영적 굼뜸에 대해서도 가슴을
치는 오늘입니다. 영적으로 맺어진 가족이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거룩하며(성 암브로시우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이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가족이라(대 바실리우스)는 말씀을 깊이 새기길 희망합니다.
주님! 익숙하고 편한 관계 속에 안주하려는 마음에 새로운 영을
불어 넣어주소서! 아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만 머물지말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하느님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혈육사이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갈망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는 하느님 방식을 따르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자주 듣게 될 때 우리는 소유와 집착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어떤 이유나 변명으로도 막아설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장시켜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게합니다.
신앙인의 기본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기쁨에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맡겨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형제, 자매의 관계형성|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루카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 8,19-21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혈연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 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보면 출가함으로써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억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 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 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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