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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절 단상
전호준
국민안전처에서 지난주 금요일에 이어 5월 29일 11:00 폭염주의보 발령 문자가 왔다. 봄의 여운도 채 가시지 않는 마당에 폭염 주의보라니! 무슨 놈의 날씨가 봄, 여름도 분간 못 하고 널뛰기를 하니 치매라도 걸린 모양인가?
벚꽃 향연에 꽃 축제한다고 전국이 떠들썩하고 온갖 꽃들의 화려한 자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것이 어저께 같은데 벌써 한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니, 하늘 탓만은 아닌 듯 인간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대가인 양 최근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만큼 위태로워 짜증 아닌 걱정이 된다.
오월의 여왕이라 불리는 마당의 장미꽃이 그 화려한 자태를 감추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부스스한 꽃잎을 맥없이 떨 군다.
떨어지는 꽃잎을 아쉬워 말라는 듯 시시각각 푸름을 더해가는 청록의 싱그러운 이파리들이 아우성치듯 젊음을 노래한다. 바야흐로 성장과 생동의 상징 신록의 계절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청춘의 상징 오월의 끝자락 5월 30일 오늘은 음력으로 5월 5일 단옷날이다. 단오는 여름을 준비하는 명절로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여겨왔다. 예로부터 여인들은 창포로 머리를 감고 사람들은 각종 민속놀이를 하며 큰 명절로 지켜왔다고 한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하는 동요같이 양력 오월이 어린 새싹이 움트고 자라나는 소년. 소녀의 달이라면 6월은 생동감 넘치고 혈기왕성한 청장년의 달이다. 온 천지가 싱그러움으로 생기가 넘쳐나고 힘찬 생명력에 심장의 피가 용솟음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 희망이 솟구치는 신록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눈을 매혹하고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봄꽃보다 싱그러운 녹음에 묻어나는 풋풋한 내음, 눈과 가슴에 편안함을 선사하는 초록빛이 나는 좋다.
그 옛적 겪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 시절 들판은 온통 보리와 밀밭 일색이었다. 소를 산에 띄어놓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초여름 따사로운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녹색 물결 위로 실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녹색 양탄자같이 폭신한 잔디에 몸을 누이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사이로 맑은 햇살이 눈부시고 파란 하늘과 맞닿은 녹색 천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하나같이 땅속에 뿌리를 박고 하늘이 내리는 빗물을 마시는데 왜? 봄꽃은 모양과 색깔이 천차만별 다르게 피었다가 지고 잎은 왜? 모두가 녹색으로 피어날까? 어째서 가을 단풍은 오색으로 물들어 떨어질까? 평생 풀지 못한 요술 같은 식물들의 장난스러운 성장 법칙이 마냥 궁금하기만 하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모든 사람이 꽃을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꽃은 사람의 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종족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소멸한다. 소임을 다한 꽃이 지고 나면 힘찬 성장과 결실의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합당한 일상복, 녹색 이파리로 옷을 갈아입고 오직 일에만 열중하는 청장년기를 맞는다. 이것이 녹색이요 삶의 원천인 신록의 표상이다. 그래서 나는 신록의 싱그러운 품에 들면 환희와 희망, 삶의 욕구가 끝없이 솟아난다.
무지개의 신비한 가시광선 한가운데 자리한 초록은 흥분된 사람조차 진정시키는 신비의 색이라 한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에너지를 재충전해주는 평온한 이미지의 색이 녹색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기를 함빡 머금은 초록의 향연 그 시절 이맘때쯤 우리 고향에는 신록의 계절을 자축하는 단오절 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시장 너른 공터에 기둥을 세우고 어른 팔뚝만 한 새끼줄로 그네를 매었다.
한편에는 씨름판을 만들고 시장 곳곳에 차일를 치고 윶 판을 벌였다. 이날 만큼 면 소재지 시장 마을은 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이 났다.
치렁치렁 댕기머리 처녀들과 단발머리 소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더벅머리 총각들이 힐금힐금 뒤따르며 장난을 걸었다. 이날만은 남녀노소 전 면민이 한마음이 되는 면 단위 큰 축제였다. 옥색 치마저고리에 비단 댕기를 단 망아지 같은 처녀가 그네에 오르면 더벅머리 총각들은 나부끼는 치맛바람에 고무풍선이 되어 마른 침을 남몰래 삼키며 이유 모를 탄성을 자아냈다.
어깨 뒤에 숨어 씨름판을 엿보는 처녀들의 눈길이 야릇하게 빛났고 선수로 나온 마을 총각들은 사활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 씨름판 건너 버드나무 밑에 매어둔 송아지의 주인이 누가 될까 한판 한판에 가슴 조이는 함성과 탄성이 여기저기 메아리쳤다.
차일 밑 척사(윷놀이) 판에서는 모야! 모야! 소리에 마을이 떠나갈 듯했고 원했던 패가 나오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은 삶의 환희 그 자체였다.
나는 사실 이러한 놀이 보다. 단오절에 먹는 쑥떡이 더 좋았고 그때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이른 봄부터 쑥국을 끓이고 남는 쑥을 말려 두었다가 단옷날에는 이래 쑥떡을 했다. 쌀이 귀하던 그 시절 쑥떡은 쌀을 절약하면서도 온 가족이 보릿고개가 절정인 이때 유일무이 맛볼 수 있는 귀한 별미였다. 요즘 쑥떡은 인절미 모양이지만 그때 쑥떡은 어른 손바닥만큼 넓적하게 만들어 볶은 콩가루를 묻혀 먹었다. 쑥 내음 풍기는 쫄깃 고소하고 쌉쌀했던 그 맛 때문에 지금도 유독 쑥떡을 좋아한다.
행사가 끝나는 날 밤에는 콩쿨대회라 명명한 면민친선 노래자랑을 했다. 아무런 악기도 무대도 없다. 어느 집 들마루를 두어 개 갖다 놓고 시장 소리사에서 빌린 스피커와 마이크가 전부다.
사회자는 평소 마을에서 이빨 센 청년이 맡고 심사위원은 도시에서 수도꼭지나 빨아본 반 놈팡이 친구나 평소 하모니카나 기타 줄을 퉁기며 빈둥대는 자칭 마을 한량 중 한두 명이 맡았다. 심사 규정은 아예 없다. 심사 도구는 놋대접과 젓가락 하나면 된다. 심사는 엿장수 마음이다. 노래 도중 맘에 들지 않으면 주심이 젓가락으로 놋대접을 한번 땡 치면 탈락이다. 땡땡땡 연달아 두드리면 일단 통과다.
노래자랑이 끝난 즈음 보리 내음 물씬 풍기는 싱그러운 보리밭은 청춘 남녀의 밀회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삭이 팰 무렵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사잇길을 걷노라면 일렁이는 녹색 물결이 찬란한 햇빛에 기름을 바른 듯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코끝에 와 닿는 풋풋한 보리 내음, 노고지리 구름 속에 노골노골 애절히 울부짖어도 우리들은 노고지리 둥지를 찾아 이리저리 보리 이랑을 헤집고 다녔다. 어느새 청춘의 심볼 같은 녹색 얼룩이 옷깃 곳곳에 은은히 묻어났다.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하시(勝花時)라 우거진 녹음이 꽃피는 봄을 이긴다고 옛 시인은 일찍이 신록을 예찬했다.
법이산 등산길, 우거진 숲속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본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연녹색의 수액이 땅 밑으로 머리 위로 스르르 번져오는 것 같다. 엉덩이가 녹녹해지고 머리가 산뜻 하다. 어느덧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한 포기 풀이되어 그들과 동화되는 벅찬 환희에 빠져본다.
2017. 5. 30 단오 날에
첫댓글 옛 단오날의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어린 시절의 단오날이 생각나네요. 사는 게 어려워도 그때는어려운 농사일을 앞둔 시기에 농민들의 사기를 돋우는 명절중의 명절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옛날 시골집안 아재 되신분이 씨름대회에 나가 송아지를 상품으로 받았다고 잔치를 해 그때 단오가 명절인줄 알았습니다. 시골보에서 물고기를 잡아 물고기국을 끓여 재실에서 할아버지들은 사랑채 할머니들은 안채에서 점심을 대접받던 시절로만 기억하다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이곳 경산에 이사오니 자인 계정숲에서 대대적인 단오제를 3~4일에 걸쳐 한장군페스티벌, 씨름 볼거리, 먹을거리 축제가 대단했습니다. 우리아재가 상을 타오신 그때 부터 있었던 자인단오제인줄 이곳 이사후 알았습니다.
신록의 계절은 역시 좋은 계절인가 봅니다. 녹음우거진 신록의 계절이 꽃피는 봄을 이긴다고 하니 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단오절 풍경을 잘 묘사하였습니다. 예전에는 큰 명절이었습니다.좋은 전통은 길이 길이 보존 되어야 합니다.잘 읽었습니다.
한시대에 고유의 단오행사가 많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제 자인 단오제등 특별한 곳에서 하는 행사로 남게되었습니다. 어릴적 생각하며 잘읽었습니다.
콩가루를 잔뜩 묻힌 쫄깃하고 고소한 쑥 내음 물씬 풍기는 쑥떡이 최고입니다.
그 시절 쑥떡 맛도 그립고, 동네 재실에서 실시한 콩크르대회에서 단골로 입상하여 다리미, 가위 등을 타오던 형의 모습, 마당 한컨에서 창포로 머리를 감으시던 어머니의 모습, 동네 옆편 노송에 그네줄을 매어 그네 타기 대회를 하던 풍경 등을 다시 회상해 보게 됩니다. 시골맛이 잔뜩 풍기는 좋은 글입니다. 옛시절을 잘 묘사한 글을 통하여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자연의 선비. 계절의 변화. 조상의 지혜가 어우러져 예로 부터 전해 오는 단오명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단오절 행사를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 시선한 풍경을 보는 듯 합니다. 단오가 신록의 계절과 얽혀 행해졌던 옛 시골 풍습이 짐작 됩니다. 잘 읽렀습니다.
단오를 즐기는 고향분들 속에 함께 노니는 기분이 듭니다. 쑥떡 얘기에 군침이 돌기도 합니다. 청보리밭 일렁이고 청록빛 나뭇잎 팔랑이는 나무 그늘에서 쉬어 가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도심에서 자라 단오절 행사를 본 적이 없었는데 강원도에 근무할 때 강릉단오제에 들러 여러가지 진기한 장면을 아내랑 원도 없이 실컷 구경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강릉단오제 그 장터에 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