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아침, 답사 이틀째 날이 밝았다. 남해 미조항에서 맞는 아침이다.
6시경 일어나 밖으로 나와 엷게 해운이 낀 미조항 포구를 거닐며 둘러보았다. 한희민 이사는
마을 중턱의 옛 미조진성 흔적을 찾아 한바퀴 돌고 왔노라 하였다. 노인회관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엊저녘 늦게까지 음주에 가무까지 치달렸던 여파가 젊은 축들에게서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았다. 조용한 마을에서 혹 시끄러워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처럼 편히 자신의 공간을 선뜻 내주셨던 노인회분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202호실의 어르신께서도 기침하시어 준비를 마치고 둘러들 앉으셨다.
노인회회장님께서 일찍 회관으로 나오셔서 아침인사를 나누셨다. 충장공의 공신책봉 이야기가
나오자 조상께서도 임진왜란의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셨다며 다시 집에 가셔서 그 녹권의
복사본을 가져와 보여주셨다. 역시 원본을 소장하고 계신 것은 아니었다. 충장공 자료로 차후
반드시 확보해야 할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중요 기록이라고 여겨졌다. 선무원종공신에
대한 최근의 서지학적 연구에 의하면 연달아 적혀 있는 직위와 성명을 구분하여 헤아리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전체 총 9,060명 중에서 각 등급별로 정확한 숫자가 알려진 것은 아직
보이지 않고 단지 대략적인 수효만 알려져 있는데, 1등은 주로 왕실 종친과 전현직 고위
관원들로서 임해군, 순화군, 인성군, 유성룡, 윤두수, 정탁 등과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
의병장들이 포함된 500여 명이고, 2등은 전현직 문무관원들과 한량, 양인, 금군, 공사천 등
잡다한 신분층들이 포함된 3,400여 명, 3등에도 전현직 문무관원이 포함되었고 대부분이 중인
이하인 잡다한 신분층들을 포함한 4,000명이 넘는 인원이라고 하였다(임기영, 2012년).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선무원종공신녹권>의 체제를 대략 소개하자면, 우선 표지 제목은
'선무원종공신녹권'으로 모두 동일하다. 내용은 등급을 구분하여 관직명과 이름만 내리
수록한 것이 대부분이며 첫 장 첫 줄에도 같은 권수제(卷首題)가 들어가 있으며 제2행에
수급자(受給者)의 직위와 성명을 적었다. 제3행에는 공신도감의 봉명자(奉命者)로 모두 같이
"만력 33년 4월 16일 행도승지 신 신흠 경봉(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行都承旨 臣 申欽敬奉)"
이란 말이 들어갔다. 그 다음은 선조의 전지가 뒷면 첫 행까지 이어지는데, 이 문장은 선조실록
1605년 4월 16일자에 아래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문).
그 다음부터는 바로 직위와 인명이 이어진다. 등급별로 수록이 끝나는 곳에는 "~等乙良宣武
原從功臣一等[등일랑 선무원종공신 1등]이란 이두문 표현을 백문(白文)으로 넣어 구분
하였다. 첫 장 처음의 수급자 이름과 임금의 전지가 시작되는 행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
라는 어보가 주인(朱印)으로 찍혀 있고 작은 첨지를 별도로 덧붙여서 가려놓았다. 이 어보는
인명 나열을 마친 끝에 포상규정 전지 부분에도 하나, 권말의 공신도감원을 기재한 면에
하나가 더 있어서 모두 3번 찍혀 있다. 뒤의 포상규정은 토지나 노비 등이 주어지는 정공신
과는 달리 대부분이 '각기 1자급을 더한다[各加一資]'는 것이 전부이며 부모 봉작(1등)이나
자손에게도 1자급을 더해준다는 것이다. 범죄인에겐 관리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노비
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이런 체제의 녹권을 동일한 형식으로 목활자 인쇄본을 찍어 배포한 것인데, 간행과정의 논의
내용이나 절차, 공신도감의 담당인원 및 소용 물자는 녹권의 간행 뒤에 <호성·선무원종공신
도감의궤(扈聖宣武原從功臣都監儀軌)>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낸 것이 전해오고 있다(서울
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리고 현재 공공도서관 등에 소장된 현존하는 선무원종공신녹권의
수효는 일부 개인소장본을 포함하여 모두 40종 정도가 된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당시에
수급자에게 녹권의 발급여부가 확인된 것은 그 절반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또한 현존 판본
들의 판종은 소장처의 기록에 선조실록자, 훈련도감자, 공신도감자 등등과 같이 다양한
목활자로 표기되어 있어 혼란스러우나, 실제로 목활자 인본을 글자별로 대조한 결과 녹권에
사용된 목활자체는 처음 선조실록자가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크기가 13.2×13.3
mm의 정방형으로 더 크고 자양도 반듯하고, 또 같은 갑인자체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훈련
도감자보다도 획이 굵고 고르며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형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녹권발간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기관의 공신도감자로 찍어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말이다.
복사본 녹권에서 충장공의 성함을 찾아보려 했으나 식사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회장님께는 많은 관심과 두터운 배려에 감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항만 저편의 식당으로 걸어가
미역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남미횟집).
나중에 생각해보니 구묘유허지를 둘러싼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내려가서 걸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유허지 산자락 아래의 가는개 마을쪽으로 돌아서 미조남항으로도 찻길이 있었는데,
아마 버스가 쉽게 갈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 바다가 미조항전투의 전적지였던 바다다.
맑은 날 아침, 옅은 해운이 걷혀가고 있었다. 다음 답사지는 남해 서북쪽의 이락사다.
이락사나 충열사 모두 충무공과 관련한 역사유적지들이다. 전적지이기도 하지만 충무공
순국 이후로 진행되었던 유적들의 추숭사업들을 본다는 의미도 내게는 중요해 보였다. 둘러본
시간이 짧아 관련 기록들을 뒤에 더 확인하며 살펴야 하기도 할 것이다. 진주성까지의 아래
답사한 곳들은 그런 개략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8시 30분경 버스는 미조항을 떠났고 곧 남해의 명산 금산(錦山) 남록을 돌아나갔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만 금산을 조금이라도 언급하지 않고 남해 답사를 했다고 할 순 없다. 금산은
보리암 등의 불교 유적들이 있고 정상능선 못 미처까지 차량이 올라가 탐방객도 많은데,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과 함께 남해 관음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동해는 양양 낙산사, 서해는
강화 석모도). 작년말 사전답사 때는 미조항을 정확히 바라보려고 올라갔었고, 동남향을 바라
보며 파노라마 사진을 찍어두었다. 중앙 왼편의 나뭇가지 끝으로 방파제가 있는 오똑한 봉우리
아래가 미조항이다(확대 보기!). 육지풍경에 익은 눈으로는 한두 번 본 풍경이라도 섬과 바다의
위치감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 맑고 흐린 날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하니 아무리 지도를 펴보며
익혀두려고 해도 시선으로 가늠하는 방향 및 거리 감각 등 지리감은 모자라게만 느껴진다.
오른편의 포구 안쪽 마을은 상주다.
여기서 바다를 대하는 풍치는 그야말로 시원한 시야의 트임이 이를 데가 없을 정도다!
예로부터 이곳 보리암에서의 일출 장면을 보는 것이 이름이 나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한문
학계에서 많이들 소개한 조선시대의 유산기(遊山記) 문학 중에도 더러 금산을 다녀가고 쓴
유산기들이 몇 편 있다. 그 가운데 경상우도의 선비로서 유람하는 명승처마다 바위에 이름을
각자(刻字)해놓은 유적을 많이 남긴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년)이라는 진주 사람이
있었는데, 작년 다녀갈 때 보리암 경내에서 너무도 뚜렷한 그의 암각자를 보았었다. 이참에
그가 쓴 유산기도 읽어보았다.
정식은 과거를 단념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평생을 포의(布衣)로 산
사람으로서 산천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였다. 이 암각자는 그가 43세 때였던 1725년 8월
19일 금산에 올랐을 적에 새긴 것이며 문집인 <명암집> 권5에 <금산록(錦山錄)>이란 기문이
실려 있다. 이 기문의 특징은 보리암이나 대장봉, 일월대, 연화대, 구정봉, 홍문 등 암봉이나
암자 등을 자세히 묘사하여 남겼다는 점이고, 또 보리암에서 이틀이나 자면서 21일에 일출을
본 사실을 기록한 점일 것이다. 기대하던 미조항 이야기는 없었지만, 20일 밤에 비가 와서 그가
맑아진 시야로 일출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안내하던 스님은 일출을 보기가 드문 일이라며
"비가 온 뒤에야 볼 만한[雨後可見]"데 그처럼 보았으니 '산연(山緣)'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하였다. 또 동변(東邊)을 가리키며 대마도를 알려줬다고도 하였다. 여기서 스님의 말로 전한 이
내용이 지금도 확인된 사실로 알려져 있는지, 또 실제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래서도 보듯이 훨씬 이전의 다른 금산 유산기에도 그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자면,
그런 체험적인 사실 역시 어쨌건 조선시대에 이 해역의 지리적 인식에도 충분히 반영되었
으리라고 여겨졌다. 정식은 세존께서 앉았던 자리라는 연화대(蓮花臺. 별칭 坐禪坮)가 좌우로
범봉과 향로봉을 두고서 그 아래 암벽 사이에는 도솔암이 있다고 일대를 자세히 서술한 다음,
"산의 정상은 형세가 허공중에 매달린 것 같은데 앞에는 창해가 임하니 드넓게 확 트여 끝 간 데가
없고, 물과 하늘이 한 색깔인데다 바람에 나부끼는 듯 허공을 업신여기며 바람을 거느리는 뜻이
있으니 '천하에 제일 뛰어난 자리'라고 이를 만하다[盖山之上頂 勢若懸空 前臨滄海 廓然無際 水天
一色 飄飄乎有凌虛御風之意 可謂天下第一勝處]"
라고 꼽으며 묘사하였다.
그런가 하면 금산에서 미조항을 바라보며 직접 언급한 대목도 다른 유산기에서 발견할 수
있어 반가왔다. 김상정(金相定:1722-1788년)이란 사람이 쓴 <금산관해기(錦山觀海記:금산
에서 바다를 바라본 기록)>(<石堂遺稿>권2)에,
"눈앞에 작은 언덕이 솟아 있어 소나무나 상수리나무를 입고 있으니 곧 미조항이었다. 수년 전에
(중국의) 소주·항주 사람들이 표류하다가 이 사이에 당도했다고 하였다. 문득 배가 돛을 펼치고
가로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眼前有小阜隆然 松櫪被之 乃彌助項
數年前蘇杭人漂到此間云 忽有船張帆橫過 瞬息不見]."
라는 언급이 보이는데 이때는 1760년 4월 중순이었다. 이 사람은 스님들의 시중을 받으며
가마를 타고 올랐고, 금산 봉수대 및 그 부근의 암벽에 새겨진 "유홍문 상금산(由虹門上錦山
:홍문을 거쳐 금산에 오르다)"란 암각자에 대해서도 언급해놓았다.(사진은 인터넷 gruturgi.com)
지금도 대부분 그렇게 알려져 있듯이 김상정은 이 암각자 대자 6자와 소자들도 읽으며 주세붕
(周世鵬:1495-1554년)의 글씨라고 하였는데, 소자는 새긴 날짜가 '가정 무술(嘉靖 戊戌:
1538년)'이라 읽었으나 여러 글자가 '박락(剝落)이 많아' 읽히지 않는다고 하였고 대자도 그
"점획들이 굳세지만 긴장돼 보여 완연히 새로 새긴 것 같다[點畫遒緊 宛如新刻]"라고 하여
그가 본 당시의 상태를 기록해두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재미난 점은 위에서 말한, 이보다 35년 전의 정식도 이 대자 각자를 보았는데 그는 이와 달리
'고운필(孤雲筆:신라 때 최치원의 글씨)'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정식은 소자로
새긴 '주세붕'이란 글자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또 이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이 소자 49자를 거의 다 읽어서 기록해놓은 유산기도 엄연히 있었다.
1679년 9월에 유배온 약천 남구만(51세)을 모시고 금산을 올랐던 아들 남학명(南鶴鳴:
1654-1722년)의 <유금산기(遊錦山記)>라는 글인데, 여기서는 주세붕의 이름은 물론이고
동행자들의 이름을 적으며 글씨는 진사 오계응(吳季鷹. 자 翰之)의 "아들 오현남이 썼고
각자한 스님은 옥공 도□이다[翰之子顯男書 刻僧玉工道□]"라고 읽었었다(그의 문집
<晦隱集> 권2. 한국고전번역원의 원문 참조). 하지만 이미 이때도 읽기가 쉽지는 않았던 듯,
"큰 획은 팔뚝과 같고 가늘게 쓴 것도 또한 안공(안진경)의 <중흥송>과 같지만 암석 결이 거칠고
사나워 겨우 이끼를 치우고서야 알아보고 읽을 수 있었다. 손가락을 구부리며 무술년을 꼽아보니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이나 되었다[大畫如臂 細者亦如顔公中興頌 而石理麤頑 僅能 掃苔認讀
屈指戊戌於今 一百四十餘年]."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결국 이 암각자의 진실은 16세기 전반에 주세붕이 어른으로서 다녀가고
또 그 대표성을 들어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주세붕 암각자라고 부르는 것까지야 딱히 틀렸
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때 글씨를 쓰고 새긴 사람은 엄연히 따로 있었다는 점, 그것이 17세기
후반까지는 읽힐 수가 있었지만 18세기 전반에는 알아볼 수 없다가 18세기 중반 어느 시점에
중각(重刻)을 거쳤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주세붕의 글씨라고 잘못된 설명이 인터넷에 나도는
모습을 보고는 잠시나마 본론에서 벗어나 부연설명이 길어졌지만, 필자 역시 90년대 말인가에
처음 가서 쓰다듬어 본 뒤로 이번에야 순전히 미조항 기록을 찾다가 그 전거들을 올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과거 선조들의 문화유산은 어느 것이나 그것이 만들어
지던 당시의 정성과 노력만이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시간의 더께를 늘 염두에
두고 그만한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울러 바로 이 남학명의 <유금산기> 앞부분에도 위에 말한 1725년 정식의 <금산록>처럼
대마도를 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사방의 먼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생긴 모양마다 지명을
말하는데, 동쪽으로 "한 필의 명주 같이 있는 것은 일본의 대마주다[有如一匹練者 日本之對馬
州也]"라고 적었다. 남명학은 26세에 처음 유배지인 거제도로 아버지를 모시고 갔지만 한 달 후인
4월에 남해로 이배되었다가 그해 말에 해배됨으로써 잠시 다녀갔을 뿐이었으나, 이처럼
부친을 따라 다니며 그는 함경도의 칠보산이나 회양의 금강산 등의 명산을 많이 다녀본
경험을 바탕으로, 금산의 빼어난 모습을 서술한 다음에는 개인의 견해임을 전제로, "칠보산의
사암(寺巖)·주봉(舟峰)은 홍문(虹門.쌍홍문)에 양보해야 하고" 어느 산의 어디는 금산의 무엇에
못 미치거나 부족하다는 식으로 금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비교론을 펼친다. 그 결론에 이르러서는
"여러 승경을 끌어쥐고 뭇 아름다움을 모아놓았다[撮諸勝而集衆美]"고 언급한 다음, 만약 이것이
서울 근처의 강가에 놓여 있었다면 시인묵객의 잦은 발자취로 벌써 그 '화문고명(華聞高名:아름
다운 풍문과 높은 명성)'이 중토(中土)의 여러 산들을 뒤덮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남해의 금산에는 또한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암각자가 전해온다. 상주면에 있는
'남해 양아리각석'(지정기념물 제6호)으로 중국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러 보냈던 서불(서복)의
글씨 유적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직접 보지는 않은 유적으로, 사진은 남해군 누리집에 있는
것으로 대신한다.
남해군의 해설에 따르면 최남선, 오세창, 정인보 등이 내놓은 여러 설들이 있다며 "일명
'서불과차(徐市過此: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금까지 해독을 하지
못하여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선사시대 석각, 그림문자, 거란문자 등의 해석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암각자 있는 능선 위쪽에는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와서 살다
갔다는 전설이 있는 부소암(扶蘇岩)도 있다. 신선의 섬이라는 이미지도 이런 전설과 무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해군에서는 '유배문학관'을 만들어 남다른 문화콘텐츠로 삼고 있는데,
그 시원이 바로 이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과차문학'이라고들 주장하기도 한다. 유배
문학관의 누리집 자료실에는 고려시대 이래의 180명이 넘는 인명이 조사되어 있고, 더 추가
되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버스가 벚꽃 만발한 19번도로를 따라 마침 그쪽 등산로 아래를 지난다. 차창으로 유채
꽃밭의 환한 노랑색이 비쳐들었다. 이 골짜기 아래가 두모마을이고 앵강만 입구를 향해 열려
있다. 곧 바닷가길로 접어들어 앵강만이 훤히 나타나고 입구 동쪽에는 서포 김만중(1637-
1692년)이 유배를 왔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노도가 있다. 왜란 때 배의 노를 많이 만들어
노도라 부른다고 하였다. 1687년 그는 대제학으로서 장희빈과 관련된 언사 문제로 탄핵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를 갔다 1년후 돌아왔으나, 1689년 2월 다시 남해 유배형이 떨어졌다. 어머니
윤씨의 상을 치르지도 못한 상태였던 그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국문소설을 지었다.
<사씨남정기>는 처첩 갈등을 다룬 가정소설이지만 무대는 중국이어서 남정(南征)이란 양자강
남쪽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래도 실제로 '남해' 및 '남해도인'이란 지명은 나온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마당에 정치사회적 비판의 성격을 지닌 문학작품을 형상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지만, 숙종의 회오는 그가 적소에서 사망한 1692년 이후에야 작품 중에서 사씨가 본처로
다시 돌아오듯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으로 실현된 셈이었다. 국문학사상 이처럼 불후의 명작
들을 남긴 것 말고도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수준높은 문인이기도 하였다. 춘천 서면 안보리에도
그의 필적 유적이 남아 있으니, 경춘국도변에 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신도비'의 두전(頭篆:
비문의 윗쪽에 전서체로 쓴 제목) 글씨가 그가 쓴 것이다.
③ 이락사
9시 10분경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문화재청의 공식명칭) 주차장에 당도하였다.
남해군청 누리집에는 지금도 "일명 이락사(李落祠), 사적 제232호"라고 소개하고 "관음포
앞바다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이충무공의 영구를 맨 먼저 육지에 안치했던 곳이다. 공이
순국한지 234년 후인 1832년(순조32)에 공의 8대손 이항권이 왕명에 의해 단을 모아 제사
하고 비와 비각을 세워 이락사라 칭하였다"는 설명이 여전히 올려져 있다. 이 내용은 이락사
앞마당의 안내판에서도 같다.
이른 아침인데도 휴일이라 관람인원이 꽤 많았다.
작년말 다녀가면서부터 내게는 그 '이락사'란 이름이 내내 거슬렸다. 사당에 모시며 높여 추숭
하는 분을 왜 예속에서 하듯이 기휘하지는 않고 '이(李)'라고 꼬집어 가리킨단 말이며, 또 다른
세상으로 가신 분을 잘 보내드린다는 마음에서라면 하필 '떨어졌다[落]'는 표현을 굳이 쓴단
말인가? 우리가 조선왕조를 '이왕가'라고 부르지 않듯, 조선시대에 '이락(李落)'이란 말이 과연
가능하기는 했을까? 그런 점에서 '이락사'란 표현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를 망한 왕조라고
내려보았던 잘못된 자세가 함축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위 설명에서 순조 때에
이미 후손인 통제사 이항권이 그렇게 불렀다고 하였으나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남도 아니고 스스로 제 조상의 사당이름을 성씨를 붙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어디 우리의
예법이란 말인가? 설사 남이 자기 성씨의 사당을 그렇게 부르면 말릴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우리네 성씨 풍속이 아니던가? 또 이씨에 충무공만 있는 것도 아닐진대, 어찌 충무공을 가리켜
딱히 '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나 조선시대의 고전문헌 어디에서도 그런 단어는 용례가 보이지 않고 검색도 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항목 설명,
설창수, <李落祠에서>(1982년)란 글,
<승정원일기> 2월 6일자의 "忠烈公宋象賢, 文烈公趙憲, 忠烈公高敬命, 忠武公李舜臣殉節之所與同殉將士, 設壇致祭"란 기사 및
<연천집>의 <관음포유허비>란 글들 참조.
④ 노량 충렬사
남해의 역사문화적 위상을 높여주는 인물로는 충무공도 충무공이지만 그보다 이른 조선전기의
인물로서 앞서 말했던 자암 김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안평대군이나 한석봉과 함께
꼽히는 조선전기의 명필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 등과 함께 움직였던 기묘명현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남해도로 유배와서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았고 <화전별곡(花田別曲)>이라는
경기체가를 지어서 국문학사상으로도 불후의 이름을 남겼던 인물이다. 화전이란 바로 남해도의
별칭이다.
천지애 지지두 일점선도 (天地涯 地之頭 一點仙島
좌망운 우금산 파천고천 左望雲 右錦山 巴川高川
산천기수 종생호준 인물번성 山川寄秀 鐘生豪俊 人物繁盛
위 천남승지경 긔 엇더하니잇고 偉 天南勝地景 긔 엇더하니잇고)
(가없는 저 하늘 끝없는 지평선에 한 점의 신선이 사는 섬이라
왼쪽은 망운산, 오른쪽은 금산, 그리고 봉래와 고내
산천은 수려하고 호걸과 준재도 많아 인물이 번성하구나
아, 하늘 남쪽에 있는 곳, 그 경치가 어떠한가?)
이렇게 남해도를 묘사하며 시작한 별곡은 마지막에서 변격을 보이며 서울의 번화함보다도
'석전모옥(石田芽屋:돌밭에 띠집)'이라도 시골마을의 모임(鄕村會集)이 더 좋다는 말로 맺었다.
조선후기에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 기록 참조.
18세기 유의양이 남긴 한글 산문 <남해문견록>에 '충무공서원'이란 기록 등의 유래 참조.
⑤ 진주성
이 부분은 답사기 생략.
첫댓글 잘 많이 배우고 갑니다^^
자료 추적과 확인을 잘하셨습니다.잘봤습니다!
2년이 지나 내일 다시 같은 코스를 답사하게 되면서 미진한 글을 다시 보면서 당시 힘들더라도 완성시켜놓지 못했음을 후회하였습니다. 당시 생각에는 남해군의 옛 읍지들을 샅샅이 뒤져보며 자료를 보충할 생각으로 미뤄두게 되면서 답사시의 생생한 느낌과 맥락을 스스로 놔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올해 답사를 다녀오고 이를 보충하여 새 답사기를 작성해볼 생각입니다.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