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0
2월23일[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JNLSTsmPNQ (양우철 예수의 야고보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반드시 화사한 봄날이!>
참으로 혹독한 시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몰상식과 파렴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과 난감함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국격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언제나 이 큰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우리 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어서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경제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갖은 멍에를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받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 능력, 내 긍정적 측면, 내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나란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 업적, 내 위치, 내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게, 때로 한시적으로, 때로 평생 따라다니는 수많은 유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의 하느님이라며, 왜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하며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실 것입니다.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다 큰 선으로, 결국 사랑으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축복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보다 큰 도약, 보다 큰 기쁨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YmSsk_nvA0
++++++++++++++++++
<사랑은 생명을 투자하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틀을 보면 조금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투자하면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을 내어놓음입니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열정은 또한 수난(passion)을 전제합니다. 열정이나 수난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무석 교수가 의무관이었을 때 본 자해하는 청년은 몸에 피를 내지 않으면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 계속 자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내는 것은 수난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내 피를 쏟을 목적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은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남자는 고아로 자라서 애인에게 배신 당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여자는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어머니에게 외면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내 피를 쏟을 수 없다면 스스로 피를 내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 없는 삶은 열정이 식은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위해 피를 흘리면 될까요? 돈과 쾌락과 명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게 다야?”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공갈젖꼭지처럼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이 오지 않고 결국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어차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곧 피를 쏟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목적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피 흘림, 아기를 기를 때의 피 흘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욕도 잃지 않고 투자한 만큼의 생명을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낳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투자는 더 많이 벌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무언가를 사랑할 때 하게 됩니다. 투자로 나의 피, 곧 생명을 바치게 되는데 그 피, 곧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상책입니다.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비용이 회수될 수 없는 곳에 투자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 회사는 망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거나 생명을 되돌려받을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투자하며 살아야 한다면 투자비용이 더 회수되는 것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에 투자해봅시다.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만 봐도 면역력이 증가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실험결과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삶은 이 세상에서부터 투자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계셔서 영원한 생명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지 않거나 공갈젖꼭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맙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투자한 만큼 이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올바로 투자합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어느 성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현재는 하느님의 은총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드립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당신을 섬기나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월간 잡지 ‘꿈’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 알코올 중독자들, 병든 이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에 수녀님들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싸우고, 길에서 자고, 물건을 부수면서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그런 마을 사람들을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왜 싸우는지, 왜 길에서 자는지, 왜 물건을 부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도 줄어들고, 싸움도 잦아들고, 길에서 자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왜 우리가 싸우는지, 부수는지, 길에서 자는지 묻지 않았습니까?” 수녀님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따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고 허물을 캐내고 응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길로만 가는 학생을 ‘모범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범생만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로 가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넓고 빠른 길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좋은데 재미가 없었습니다. 좁고 먼 길로 학교에 갔습니다. 그 길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입구에는 만화가게가 있었습니다. 떡볶이 가게, 빙수가게, 뽑기 아저씨, 핫도그 아저씨, 구술 게임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 길로 가면 학교에 지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만 결석하기도 했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손자를 돌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따를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패자부활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을 다시 찾기만 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길이라면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뉘우치면 좋겠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우리는 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면 우리는 가라지가 될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2-25: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 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선택’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과정’이 다르게 되고, ‘삶의 끝’이 다르게 됩니다.
1)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25절의 말씀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쫓아다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이 풀이를 모두 합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얻는 일은 허무한 일이다. 온 세상을 전부 다 차지한다고 해도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라.”입니다.
23절과 24절의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나를 따르다 보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게 싫어서 피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2) 이미 신앙인이 되어서 당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내 뒤만’ 따라와야 한다.”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들, 특히 자기 안에서 생기는 속된 욕심과 욕망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매 순간 순간마다’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물리치고 끝까지 인내할 방법은 ‘기도’입니다. ‘인내’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시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4절의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신앙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한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박해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냉담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교자들보다 순교자들이 더 많고, 냉담자들보다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과 가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지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꾸준히 기도하면서 냉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에 현세의 인생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닥친 고통은 생생한 현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은 막연하게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지금 겪는 고난과 시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것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도 연결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로 가겠다고 한번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즉 허무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얻기를 희망하는 그 생명 외에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하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가 한때 충실한 사도였다는 것은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끝’이 전체를 결정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교회는 우리에게 모세(제1독서)와 예수님(복음)의 공통된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2015년 2월 19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강론 참조). 매일 매번 선택하는 것보다 습관과 타성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을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라고 호소합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벗고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새롭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세례로써 새로운 삶을 선택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이 돌아서서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며’(신명 30,17 참조)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기보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제목 ‘코지 판 투테’(‘모두가 그렇게 한다’)처럼, 다른 이들이 하는 대로 많은 이가 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기 인생이 어떠한지 스스로 두 가지 질문을 해 보라고 권고하십니다. 첫째, ‘나에게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그래서 ‘나는 오늘 주님을 선택하고 있는가?’ 둘째, ‘나와 내 부모, 내 형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느님과 가족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들에 몰두해 있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는” 삶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다시 선택합시다.
=====================
[부산교구 박종민 그레고리오 신부님]
순시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던 시대에 십자가는 사형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 거기에 못 박아 죽이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사람 죽이는 도구를 온 인류를 살리는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온 인류를 살리는 상징으로 바꾸셨기에 십자가가 요즘 세상에는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거의 100미터 마다 십자가가 있고, 많은 사람들의 목이나 팔에는 십자가 장식이 된 액세서리가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는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메고 목숨을 바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십자가가 나의 목숨을 바치는 데에 사용될 때 십자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불평을 하고 이 십자가를 거두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요?
도스프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에 보면 대심문관 논쟁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 논쟁은 둘째 아들 이반이 알료샤와 논쟁하면서 이단에 대한 단죄가 한창 벌어지던 15세기에 예수님과 추기경인 대심문관과의 논쟁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100명의 이단자가 화형에 처해지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군중이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열광하자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잡아 가둡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잡아 가두고 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 대화에서 대심문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은 기적, 신비, 권위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심문관은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결국은 빵을 따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들은 기적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을 때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들은 강력한 왕의 통치를 바라고 있으므로 그때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대심문관은 이미 인간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되었으며, 세상은 인간들이 자유를 버린 후에야 조화롭게 되었다는 것이 대심문관의 입장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그리스도가 출현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뿐이라고 하면서 대심문관은 다음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심문관에게 미소를 보이며 키스를 하고 사라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빵에 집착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주신 자유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신 가르침은 알겠는데 지금은 이 돌더러 돈이 되라고 좀 해주십시오.”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왕이 되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혼란을 준다고 말하며 십자가에 못박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치워버리려고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원래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은혜로운 때인 이 사순시기에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고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다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임종필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건강이 필요하고, 외로운 이들은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감옥에 갇힌 이들은 자유가 그리울 거고, 바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정의와 평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다 채워지면 나는 어떻습니까? 살맛 나는 세상이 되고 한마디로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을 찾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때론 변덕이 심하기도 하고, 또 인간은 병들고 죽고 마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물질에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고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찾지만 참된 행복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불평과 불만으로, 삶의 푸념을 늘어놓으며 하루하루를 그냥 덧없이 보내곤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묻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행복과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이 다를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참된 행복을 주님께 걸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곧 천국은 영원한 행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과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살게될 영원한 행복인 천국을 얻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버릴 때 가능하다.
또한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채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목표인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참 약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이라면, 타인의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가 배불러야 하고 내가 잘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익이 되는거다 싶으면,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쟁취하려 듭니다. 그리고는 꼭 움켜쥐고 내어놓을 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없어질 가치에 우리의 행복을 걸지 않도록 합시다. 점점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한 줄기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서로를 비춰주며 서로에게 녹아드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며,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행복하신가요? “그렇습니다!”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주일은 주님의 날이 아니라 일요일입니다. 쉬는 날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일요일이 주일이 되고, 동시에 주일의 의무가 생겼습니다. 미사 참례를 못 하면 다음 주일에 성체를 모시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불편한 과정이 생겨납니다.
자연스레 피로도가 올라갑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성당에 오랜 기간 나가지 않고, 정기적으로 판공성사를 보지 않으면, 가혹하게 들리는 ‘냉담 교우’라는 주홍글씨가 부여되는 것만 같습니다. 불편합니다. 게다가 이웃과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에 성당에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지치고 힘든 마음을 예수님께 의지하고자 성당에 나왔는데, 짐과 멍에가 더 부과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얻으려면 거기에 어울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일요일을 쉬는 날이 아닌 주님의 날, 곧 주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미사를 의무가 아닌, 예수님께서 거저 마련하신 잔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운 사람을 불편하게만 생각하지 않고, 그도 예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예수님 때문에 내 기준과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결심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됩니다. 노력하는 그 여정은 쉽지 않겠지만,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루카 9,22-25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살림이 되는
새 땅
새 하늘
열리기까지
누구는
누군가를
죽이고
누구는
누군가에게
죽임 당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아닌 세상에서
죽임으로써
더러운 목숨 이어가는
살아도 죽은 사람이
지우는 십자가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 내던지는
죽어도 산 사람이
지는 십자가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한 사형수의 십자가의 길 묵상입니다. “한없는 자비와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 이제 당신의 자녀로서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짐을 덜어 이 죄인의 어깨에 메겠습니다.
과거에 큰 죄를 저질렀지만, 이제는 과감히 욕망과 욕정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삶에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묵묵히 따르는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깨우치게 하소서.
비천한 제가 다시는 뒤 돌아보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지며,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해 주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해 주소서. 큰 고난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제가 짊어지지 못할 십자가는 주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게 하소서.”(김 아우구스티노) 죽음을 감당하며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이“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짊어져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향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력을 쓰는 사람과 동조해서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똑같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어떨까요? 모두 비정상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악성 댓글을 달고, 또 여기에 동조해서 또 다른 악성 댓글을 남깁니다.
이런 악성 댓글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어떻게 같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성 댓글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뇌에서는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얻어 맞을 때의 똑같은 고통의 경험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즉, 뇌에서는 칼이나 몽둥이로 맞는 것처럼 엄청난 상해를 받은 것을 깨닫습니다.
악성 댓글뿐일까요? 친구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은 말로만 했을 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을 뇌에서 느끼게 됩니다. 엄청난 폭력입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말로도 이 계명을 어길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의를 외치면서 살인을 범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나부터가 말과 행동을 조심하면서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에서 절대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주님께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버릴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이기심으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님과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욕심과 이기심이 차고 넘쳐서 더 힘든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살려면 매달려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생명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삶일지 얘기합니다.
그 방법에 대해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 단어를 나열하면 계명-생명-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생각에 여기에 순명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순명-생명-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무릇 모든 생명은 창세기 1장의 얘기대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였기에 생명이 된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생기라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그걸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 생명 맞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 명령에 순명한 결과이니 생명을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명령에 달렸다는 것이 신명기의 가르침이고 구약성경이 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생기라는 명령이고 제발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하라 마라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명령조로 얘기하면 싫어하고, 부탁하면 하려고 했던 것도 명령조면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사람처럼 그렇게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사태를 파악하고 굽힐 줄 알지만 젊었을 때는 젊은 혈기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들 듯 살라는 명령도 명령이니 따르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의사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숙하고 현명하다면 생명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에 고집부리지 말고 겸손해야 하듯 하느님 명령에는 더더욱 겸손해야 하고 순명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은 잘 들으면서 하느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살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대로 당신을 따르면 진리의 길을 걷고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 가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기 때문이니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길잡이신 당신을 잘 따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신명기의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택이다>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
“생명을 선택하여라.”
오늘 제1독서 신명기의 소주제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입니다.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저절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 좋은 삶에서 좋은 선택이 나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은 은총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100% 하느님께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삶에서 좋은 선택의 은총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말 그대로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요즘 이율곡 평전을, 세종대왕 평전을 읽으며 감탄하는 바도 노력하는 천재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참 많이도 읽은 자서전들이요 평전들입니다. 앞으로도 시간 나는 대로 귀감이 되는 옛 선비들이나 성인들, 위인들의 평전을 읽을 계획입니다. 우리는 옛 위인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 주님 말씀은 너무나 자명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선택과 훈련입니다. 타고난 것도 끝없이 많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도 있지만 바꿀 수 없는 부정적인 타고난 것들도 참 많습니다.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타고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재능도, 성격도, 건강도, 기질도, 외모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에 감사하는 때도 있겠지만 이렇지 못한 경우 좌절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때도 많을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도 많지만,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감동도 아름다움도 기쁨도 평화도 선택입니다. 선택하여 치열히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 회개로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은 결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눈이 열릴 때 선물처럼 발견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옵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선택하여 참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행복도 발견입니다. 행복의 선택, 행복의 발견입니다. 선택한 행복을, 발견한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삶,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이런이들은 결코 숙명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신명기의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모세가 참 고맙습니다. 선택의 달인 신명기의 모세,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선택의 달인,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강조하는 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직접적이며 감동적입니다. 곧바로 우리의 지체없는 선택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네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래야 참으로 사는 것이요 행복한 삶, 충만한 삶입니다. 시편 1장 화답송도 하느님을 선택하여 온전히 신뢰와 사랑을 바친 이들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생명, 우리 행복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시길 원하십니까? 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날 때 바로 스스로 자초한 불행의 연속이니 이 또한 내 탓입니다. 신명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떠날 때 도처에 널려 있는 유혹들이요 악마의 덫들입니다. 시편 화답송이 하느님을 선택한 의인들과 그 반대의 악인들에 대한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의인이냐 악인이냐? 이 또한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의인들이요, 이런 생명의 주님과 무관한 관계로 뿌리를 전혀 내리지 못해 뿌리 없이 끊임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바로 참 내가 없는 좀비 같고 유령 같은 악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최상, 최고, 최선의 선택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 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은연중 당신을 닮아 각자 십자가의 길을 각오하라는, 때로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얻은 것은 명예요 재물이고 잃은 것은 삶이요 건강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한 무지의 삶이겠는지요! 주님을 얻은 자가 자신을 얻고 세상 모두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아, 오늘은 요한 사도의 직제자인 "신앙의 용사" 스미르나의 주교 성 뽈리카르보 사도교부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선배 성인에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있고, 성 이레네오는 성 뽈리카르포의 제자가 됩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서로 보고 배운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155년경 화형에 처해져 의연히 순교할 때 성인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죽기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성 뽈리카르포 주교입니다.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선택함으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요, 이 십자가의 길에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는 제 좌우명 고백시를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살기 위해서!>
오늘 복음(루카9,22-25)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9,23)라고 말씀하시고,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이유, 우리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 우리가 희생하고, 져야하고, 낮아져야 하고, 죽어야 하는 이유!
그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 극진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생명과 행복'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처럼 죽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 자체로 죄이면서 동시에 죄의 뿌리가 되는 '칠죄종'(七罪宗), 곧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게으름)'을 끊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기 때문에.
이번 사순시기는, 내 안에 있는 칠죄종을 끊어내려고 더 노력하는 그런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화답송)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하느님을
찾게 하는
십자가를
모른 채
살았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도
십자가와 함께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알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가는
하느님 나라를
십자가로
만드십니다.
자아의 무게 만큼
십자가의 무게 또한
무겁습니다.
우리 자아가
붙들고 있는
그것 마저도
놓아 버리게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사람은
철이 듭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입니다.
스스로
사랑이 되지
않고선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에게
말을 건넵니다.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우리를 돌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닮아갑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의 영광,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의 인격을
날마다 먹고 사는
우리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
(2)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생명이
목숨입니다.
목숨을 살리고
목숨을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누군가의 십자가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랑과 희생의
목숨입니다.
목숨은 십자가 없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목숨은 사랑이며
목숨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목숨입니다.
목숨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또한
한 분위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진정으로 생명을
위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이 시간을
봉헌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