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지시다.
(마태복음 8:1~4)
오래전부터 인류를 괴롭힌 나병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나병은 환자와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전염병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피부 또는 점막이 헐어서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점점 심해져서 썩은 냄새가 나고 눈썹도 빠집니다. 눈에 나병균이 침범하면 안구가 돌출되거나 눈이 감기지 않게 되고, 각막궤양이나 백내장, 녹내장 등이 발생하여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성대가 헐어서 목소리도 못쓰게 됩니다. 촉감, 통각, 온도 감각이 소실되고 위치감각과 진동 감각도 없어집니다. 신경이 점점 마비되어 손가락, 발가락뿐만 아니고 손과 발 전부가 문드러져 없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져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됩니다. 발병해서 죽기까지 평균 9년이 걸린다고 하니 빨리 죽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보면서 죽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피부에 나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제사장에게 찾아가 진찰을 받아야 하고, 나병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그때부터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레13:8) 나병 환자가 되면 부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격리됩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성물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레22:5~6) 건강한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살던 집을 떠나 동굴이나 마을에서 떨어진 움막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가족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음식물을 가져다가 굴 입구에 던져놓으면 그것으로 연명합니다. 그것도 없으면 떼를 지어 다니며 구걸을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나병 환자와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레위기 22장 5~6절 말씀에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 성물을 먹지 못할 지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면 건강한 사람도 저녁까지 부정한 사람이 되므로 몸을 씻지 않으면 성물을 먹을 수 없습니다. 최소한 4규빗 이상 떨어져야 하고, 나병 환자가 있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면 적어도 100 규빗은 떨어져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지나가면 담이나 바위 뒤에 숨곤 하였습니다. 레위기 13~14장 말씀은 나병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하필 나병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을까요? 이사야 1장 5~6절 말씀에도 죄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마치 죄인을 나병에 걸린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나병의 증상은 죄와 유사합니다. 나병은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죄도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나병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죄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나병은 육체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죄는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나병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고, 죄도 다른 사람을 오염시키거나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나병이나 죄는 결국 육체와 영혼을 죽게 합니다. 이렇게 나병은 죄를 상징하는 병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나병에 대해서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때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때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으며,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 역시 부정한 행위로 여겼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병 환자를 고칠 때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그 부정한 몸에 손을 댔을까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을 노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지 않고도 고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보게 하실 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바디매오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했을 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하셨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은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고칠 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바디매오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말했을 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습니다.(막10:51~52) 백부장 하인의 중풍을 고쳐주실 때도 환자를 보지도 않고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즉시 환자가 나았고(마8:13),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실 때도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고 선포하셨을 때 즉시 귀신이 떠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마15:28) 그러면 왜 예수님이 만지지 않고도 치료할 수 있는데 구태여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그 부정한 몸에 손을 댔을까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을 노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36절 말씀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하고 말씀합니다.
나병 환자는 육신만 병든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외로웠습니다. 무시당했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몇 번이나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따스한 사랑의 손으로 만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 알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만져주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그 죄인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7장 13~14절 말씀에 하나님께는 손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큰 손입니다. 강한 손입니다. 힘이 있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며, 구원의 손입니다. 도움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블레셋을 물리쳤고, 아모리를 막아주습니다.
그 손은 우리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 손이 우리를 붙잡아 주셨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악한 자, 해할 자를 막아주셨습니다. 좌절할 때 그 손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내민 그 손을 붙잡고 힘차게 일어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