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기 / 홍일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허공에 게시된 색색의 표정들
너, 누구니?
대답이 없는, 가까이 다가가면 흩어져 사라지는
있는 듯 없는 방향을
몰래 훔쳐다가 항아리 속에 넣고 조금씩 꺼내 써야겠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
나는 나를 증명하지 않고
희미한 숨결로 떠돌다가 함박눈으로 흩날려야겠다
외눈박이 태양에 발각되지 않고
세상에 몰래 잠입하여
밤의 얼굴을 하얗게 칠해놓고 흰 장미처럼 웃어야겠다
밤은 나를 소비하는 일이 즐거워서 발목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나를 아무도 찾지 않을 때
가난한 문장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유리창에 성에로 얼어붙을 때
ㅡ 계간 《포지션》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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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일표 시인
1958년 충남 천안 출생.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산문집 『사물어 사전』.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2013년 지리산문학상, 2023년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 및 매계 문학상 본상 수상
38년 교사생활 후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