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85)
궁형
흉노족에 패배한 한나라 이릉 장군
사형 위기 처하자 사마천 나서는데…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기원전 139년, 그 국력을 업고 등극한 한무제는 세상 무서운 게 없었지만 단 하나 북방 흉노가 눈엣가시로 박혔다.
한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젖줄은 비단길이었다. 비단·차·향신료·도자기·종이 등등 온갖 물산이 비단길을 따라 서역으로 가고, 한나라의 국고엔 황금이 쌓였다. 문제는 흉노족이었다. 끝없이 실크로드를 막고 서역으로 가는 대상들을 약탈했다. 마침내 한무제가 칼을 뽑았다. 어느 날 한무제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릉 장군이 이끌고 나간 군사 5000명이 8만 흉노군에게 패하여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패장 이릉은 군사기밀까지 흉노에게 흘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한무제의 분노가 펄펄 끓는 중에 패장 이릉이 입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패전의 책임은 작전을 짜고 전투를 총지휘한 이광리가 져야 했지만 그는 한무제의 처남이었다. 이릉이 한무제 앞에 꿇어앉고 신하들이 늘어섰다. 한무제가 벽력같은 목소리로 이릉의 목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입을 닫고 있는데 한 신하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전하∼! 한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이옵니다. 흉노 군사는 우리의 열배가 넘었고 우리 군대는 화살이 바닥나 더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용감한 충신의 간언은 한무제의 화를 폭발시켰다. “이릉 장군의 선대도 한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릉 장군을 본 적도 없고 장군과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저놈의 주둥이 닥치지 못할까!” 결국 이릉 장군은 목이 날아가고 그 일가는 멸문을 당했다. 간언을 한 충신은 옥에 갇혔다. 그의 이름은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도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불같은 화를 조금 가라앉힌 한무제로부터 한줄기 시혜를 받았다. 사형과 벌금과 궁형(宮刑) 중 택일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벌금은 50만전으로, 군사 50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라 하급 신하인 사마천에게는 어림없는 조건이다.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나머지 하나, 궁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거세당하는 것이다. 사대부에겐 사형보다 더 치욕적이고 괴로운 벌이다. 사마천은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궁형을 택해 목숨은 건졌지만 온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풀려나 내시가 되었다. 화가 끓는 한무제 앞에서 서슴없이 직언을 한 충신이 이렇게 죽음과 굴욕을 맞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관(史官)이었다. 방대한 중국 역사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자 <사기(史記)> 집필에 나섰지만 당대에 완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마담은 전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으로 사마천이 어릴 때부터 고전 문헌을 익히도록 하고 여러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도록 독려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시종인 낭중이 되어 한무제를 수행하면서 강남·산둥·허난 등 여러 지방을 다닐 때 많은 사료를 수집했다. 이것이 훗날 <사기>를 집필하는 큰 자양분이 되었다.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눈을 감으며 사마천에게 완결하지 못한 <사기>를 꼭 마무리 지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사마천은 감옥에 갇혀서도 오로지 머릿속에 온통 <사기>뿐이었다. 사마천은 치욕적인 궁형을 택해 뭇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어도 오로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한올 한올 <사기>를 엮어나갔다.
궁형은 정신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형을 받을 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여름이면 온몸에서 악취가 나 주위 사람들이 코를 막았고, 당사자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궁형을 받은 후 사마천의 사상은 많이 바뀌었다. 정의가 꼭 승리하진 않는다는 것, 권력을 쥔 자만이 역사를 이어가는 건 아니란 것이다. 권력을 중심으로 편집한 수많은 역사서가 나왔지만, 사마천이 폭넓은 눈으로 역사를 엮은 <사기>에는 장사꾼·아녀자·도적·백정도 역사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세월이 지나며 한무제도 회한의 시간을 갖게 되어 사마천에게 술을 따르며 위로했다. “사람은 저절로 늙어 결국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거늘, 경도 그거 하나 없다고 기죽지 말고 어깨를 펴시오. 허허허∼” 매일 밤 궁녀를 바꾸는 인물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가닥씩 짜여가는 <사기>가 사마천을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마천은 마침내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부문으로 나뉜 130권, 52만6500자에 이르는 방대한 중국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다. 사마천의 나이 대략 55세 때다. 2년 후, 그는 이승을 하직했다.
💥이 샤키들 고양이가 아닐수도 있어~!!!
첫댓글 위대한 인물 그는 갔지만
아직도 우리 세상에 존재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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