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에페소 6,1-9 루카 13,22-30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문을 닫은 집주인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일이야 당연하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문밖에 선 이들은
집주인과 꽤 친분이 있어 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식사도 함께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가르침도 즐겨 듣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우리는 성찬 전례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말씀 전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습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 여정에 주어진 최상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사 참례가 자동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또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그저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넓은 문이라면 참 좋겠으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애쓰며
노력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친분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결국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문밖에 서서
‘울며 억울해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하게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 들읍시다.
문 안팎의 온도 차가 매우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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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에페소 6,1-9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은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또한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 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그렇습니다.오늘 우리는 이 모두를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급함과 절실한 요청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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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에페소 6,1-9 루카 13,22-30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매일 산보를 다니면서 가끔 제게 길을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계속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길을 걷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또 다른 길을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는 묻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묻는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의 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현명한 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쩌면 어떤 사람처럼 숫자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마치 행복도 숫자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집, 좋은 차, 비싼 보석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숫자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셨고, 재물을 창고에 쌓으려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할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비즈니스 석을 탈 수 있습니다. 전망이 좋은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는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과 욕망의 탑입니다.
먼저 가고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따라오고 있는 사람은 내치려고 합니다.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혹한 전쟁터에 내몰립니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분노와 원망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좁은 문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현문우답이 아니라 현문현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줌으로 써 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좁은 문은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된 행복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면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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