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시를 즐겨 읽었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하던 시절이다. 만원의 전철에 앉아 홀로 묵상하듯 시에 빠져들었다. 시집을 들고 다니진 않았다. 황지우, 최승자, 이성복, 최두석 등등 서로 다른 감성으로 1980년대를 꿰뚫던 시인들의 작품들을 타자로 쳐 A4 종이에 출력해 가지고 다녔다.
나만의 시 포트폴리오였다. 그걸 읽고 또 읽었다. 감상이라기보다 암송이었다. 시정에 흠뻑 취한 채로, 숫자에 도취된 종로, 광화문으로 매일 진입했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는 알아채지 못하지만 천국은 늘 그렇게 왔다 간다.
청춘을 보내면서 시를 보는 일도 줄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의 시 세계는 1980 년대, 더 올라가봐야 1990년대 초반에 머문다. 얼마 전 1990년대 후반에 시작(詩作)을 시작한 시인을 만났다.
'가랑잎처럼 떠돌던 오랑캐들은 바람이 불면 가랑잎 모이듯 그렇게 회합을 갖는 데, 그들은 자신이 쓴 시나 떠돌며 보았던 세상의 풍경들을 행랑에 집어놓고 온다.'
박정대의 시는 거칠고 아름답다. 인용한 구절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에 실린 <독립적인 영혼>의 한 부분이다. 우연히 맞닥뜨린 시어들에 감탄하면서 시인의 출발이 궁금했다.
약력을 보니 1997년 초겨울에 첫 시집 《단편들》을 냈다. 서울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제목이 검색된다. 다행이다. 1997년에 출간된 책이 도서관에 남아있긴 쉽지 않은데…. 연혁을 찾아보니 첫 출간은 1997년이지만 2020년에 재출간이 되면서 2025년의 도서관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사람 많이 오가는 서가에 있지 않고, 아마도 도서관의 지하 어느 곳엔가 자리하고 있을 보존 서고에 들어가있는 중이다. 1990년대 후반에 나와 잊히고 사라질 뻔하다가 20여 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와 서울 도심의 도서관에 들어왔지만, 보존 서고에 틀어박힌 채 사라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대출 신청이 오래된 시집의 생존을 조금이라도 늘려주었으면 좋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보존 서고에 있는 책'이란 메시지를 접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책 하나 보고 싶어 온라인 도서관을 검색하면, 절반은 '보존 서고 책'인 것 같다. 나의 독서 취향은 그렇게 자꾸만 과거로 회귀 중이다. 모니터 앞에 앉은 중년들이 아이돌의 퍼포먼스에서 몇 초 만에 눈을 돌리듯 요즘 작가들의 생각과 감성에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새로운 트렌드와의 불협화 또는 부조화에 첨엔 열등감마저 느꼈다. 신상품 마케팅에 혈안인 우리 사회는 지난 것들을 고루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들에 부여되는 찬사는 낡은 것들에 대한 무관심의 이면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지못하는 내가 때론 가여웠다.
그런데 도서관 보존 서고의 단골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보존 서고에 스민 시간의 향기 같은 걸 상상으로 느끼는 중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그러나 어느 시대의 어떤 독자들에겐 보물이었을 시와 소설, 사유와 에세이가 발길 뜸한 보존 서고에서 그들만의 내공을 뿜고 있을 것 아닌가. 오래된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보존 서고는 왠지 중세의 와인 창고 같은 느낌일 것 같다. 커다란 나무통에에서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아 자신을 숙성시키고 있을 와인이 떠오른다. 보존 서고의 한구석, 얇은 먼지층 위로 살포시 떠오르 는 문자향(文子香)을 상상하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작년 봄, 지방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책 폐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신문에서 봤다. 대학 측이 도서관을 '미래형'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책들을 폐기하기로 했는데 규모가 엄청났다. 소장한 책이 90만 권의 절반을 없애기로 했다. 새 도서관을 첨단 디지털 장비의 거처로 만들려다보니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교수들은 당황했다. 40만 권이 넘는 책들을 한꺼번에 없애는 것도 충격이지만, 폐기 도서 선정 기준도 너무 자본주의적이었다. 대출 실적이 별로 없는 책들이 폐기 대상에 먼저 올랐다. 많이 빌려 보지 않는 책들은 사라져도 좋을까. 많은 이들이 쉽게 빌려 본다고 좋은 책이 아니다. 내가 아름다운 문장에 취해 요즘 읽으려고 했던 문학, 철학책들도 대출이 많진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 도서 목록 중 상당 수가 보존 서고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없이 슬픈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책들을 지키고 싶었던 그 대학의 인문대 교수들은 동료 교수와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남겨야 할 책들의 대출 실적을 올리자고 호소했다고 한다.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일인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한 시대의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하네(長江後浪推前浪一代新人換舊人)'라는 말이 있다. 명나라 시대의 교재인 《중광현문》에 나오는 격언으로 주로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중국의 장강(양쯔강)이 아니어도 뒷물결은 언제나 앞물결을 밀어낸다. 속절없이 밀려난 앞물결은 긴 세월 자신을 보듬어주던 강을 떠나 아무런 보호막 없는 바다로 떠난다. 그곳은 망망하고 막막해 누구 하나 사라져도 눈길 주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 모두, 한때는 우리 곁을 가깝게, 때론 멀리서 돌며 그들만의 소중한 우주를 만들었던 존재들이다.
젊은 시절 전철에서 암송했던 시인 중 하나인 황지우는 노을 아래서 붉게 빛나는 바다에 반해 짧은 시 하나를 남겼다. 몇 줄 되지 않아 수십 번의 계절을 보내고도 외는 시다.
'물기 남은 바닷가에 홀로 남은 물새 그림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 바다를.'
세상 모든 것들이 때가 되면 저문다. 내가 사랑하는 책들도, 먼 바다를 비추던 대낮의 황금빛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저녁 바다가 저물면서 더욱 빛을 냈듯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책들도 어두운 도서관 지하의 보존 서고에서 가녀린 빛을 내고있길 바란다.
온라인으로 대출 신청해 둔 박정대 시인의 90년대 첫 시집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을 때 사서 선생님에게 물었다. "보존 서고로 들어가는 책들이 많은가요?" 사서 선생님의 답은 짧았고, 나는 조금 슬펐다. "새로 들어오는 책들이 많으니까요."
글 이지형(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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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습니다
사랑천사 님 !
고운 흔적 감사합니다 ~
희망 가득한 새봄을 맞아
늘 건승하시고, 기쁨과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걸음주셔서
감사합니다 ~
희망 가득한 새봄
맞이하시고 행운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