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다란 전신거울 속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거울은 한 사람의 몸피를 겨우 담을 수 있을 만큼 좁아서, 여자는 거울 속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거울이 여자 주위를 압박하여 좁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얀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개더스커트와 흰 티셔츠, 그 위에 걸친 하늘색 카디건이 여자를 얼핏 소녀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티셔츠 너머로 비어진 어깨선의 뭉실함이며 굵지 않은 목을 두껍게 보이도록 하는 목주름, 분이 제대로 먹지 않아 거칫하게 들뜬 얼굴의 살결이 눈에 띈다. 여자가 옷차림이 상정하는 나이로부터 한참 더 묵은, 그렇다, 더 먹은 게 아니라 묵은 것이다. 나이임이 드러난다. 게다가 스커트의 레이스가 조금 해진 것까지 눈에 들어오면 여자의 누추함은 안쓰럽게 여겨질 지경이다.
고무줄 허리며 넓은 치마폭이 편해서 가벼운 외출에 즐겨 입는 치마의 레이스가 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여자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다물린 이 사이로 자금자금 잘라서 내보낸다.
"관찮아요 형님, 요즘 미시주부들 못 봤어요? 아가씬지 아줌만지 저도 구분 못하겠더라고요. 발랄해 보여서 좋기만 하던걸요?"
거울 뒤편에서 흰 얼굴이 나타나 한쪽 어깨로 흘러내린 카디건을 추슬러 주며 말한다. 막내동서다. 위로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으려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내 난감한 기분을 너무 헤아리는 나머지, 정작 자신의 본심은 어딘가에 따로 꿍쳐든 듯한 느낌을 주는 여자, 막내동서의 무심한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켕긴다. 실제의 나는 내 눈에 비친 것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게 아닐까. 뭉글거리는 의구심을 막내동서가 덮어버린다.
"훨씬 밝아 보여요, 형님. 백은 어떤 거 들고 나가실 거예요?"
여동생을 첫 미팅에 내보내는 큰언니처럼 막내동서는 이것저것 챙긴다. 천성적으로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에 더 마음 쏠리는, 남 아픈 걸 보면 글썽이지만 그 글썽임을 드러내지 않고 한 겹 거를 줄 아는 지혜로움, 늘 무심해 보이지만 한 겹 안쪽에 햇솜 같은 다사로움을 펼치고 있는 얼굴, 한때는 내게도 저런 빛이 조금쯤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때 아꼈지만 어느 결에 잃어버린 물건을 떠올리듯 아련한 마음으로 막내동서를 본다.
"형님, 저 다음 주부터 일주일 동안 휴가예요. 주말에 친정에 다녀오고 나면 룰루랄라거든요.
그동안 혹시 하시고 싶은 일 없으세요?"
수화기 너머로 울려 나오는 동서의 탄력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화벨이 울리기 직전에 냉장고에서 꺼낸 캔을, 캔 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땄다.
도르르, 가을날 마른 나뭇잎처럼 속이 말릴 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안에 끊임없이 모래를 쌓아놓을 때, 그 모래가 바람결 따라 시르륵 움직이며 몸 안의 습기를 다 빨아들이는 듯 느껴질 때, 나는 마른 나무 둥치에 물을 주듯 맥주캔을 따곤 했다.
첫 모금을 들이키는 순간, 나무 둥치를 단단히 감싼 마른 땅이 물기로 검게 젖어들 듯 내장 안벽에 스며드는 물기, 그럴 때 내 눈길은 대개 거실 장식장이나 베란다의 진열대에 늫인 분재 화분들을 향한다. 잘 바랜 뼈처럼 하얀 줄기 위에 작고 뾰족한 잎이 다복다복 붙은 노간주나무, 숲속에서 하늘을 찌를듯 뻗쳐오르던 기억을 세포 속에 간직한 듯 좁다란 화분 속에서도 제법 수직으로 솟은 삼나무, 어디 마을 어귀쯤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그들이 나눈 이야기를 듣던 정자나무를 조상으로 둔, 널찍하게 옆으로 퍼진 느티나무, 시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우는 나무였다.
저 화분들에 술을 부어주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지만, 슬을 마시며 나무에 눈을 줄 때마다 나는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분무기에 소주며 맥주, 양주까지 뒤섞어 폭탄주를 만든 다음 잎이며 줄기에 듬뿍 뿌려준다. 분갈이를 할 때 본 가늘고 섬세한 실뿌리들은 알코올을 물인 줄 알고 빨아들인다. 그러다 제 뿌리에 닿는 액체의 이물스러움에 잠깐 자지러든다.
물관부에 스며든 알코올은.....나는 소파에 붙박인 채 고개를 젓는다.
2
이 나무라고, 나무에 등을 기대는 순간 근거 없는 확신이 나를 붙든다. 이 나무가 오래전 나를 안아주던 나무라고.
나무를 알아보게 만든 건 기울기다. 나무에 기대어 저만큼 돋아난 별을 올려다볼 때면 등받이가 기우듬한 의자처럼 기운 나무는 편하게 등을 감싸곤 했다. 미심쩍은 기억력이 몸을 돕는다. 이 나무라고, 나는 믿어버린다.
3
"당신 이 집 어떻게 알았어? 옥수수술이 다 있네?"
계단을 올라서서 출입문 어귀에 붙여놓은 옥수수술이라는 글씨를 님편의 눈이 빛난다.
나는 조금 쓸쓸한 득의를 느낀다.
4
이제 어떻게 한담. 계산을 하는 남편 곁에서 나는 난감하다. 이대로 이렇게 미진하게 돌아갈 수도, 새삼 무슨 말을 꺼내기에도 어설픈 상태.
밖으로 나왔을 땐 겨우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햇살은 나직하고, 밤을 예감한 나무들은 제 빛을 거둬들여 침묵 속에 자기를 가두는 시간, 어스름이 깔리는 거리는 환할 때보다 오히려 흥성하다. 낮 동안 별을 받아들인 가로수의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함에 덮어쓴 비릿한 냄새가 공기 속에 떠돈다.
밤이면 풀벌레들이 쓰르르쓰르르, 제 날개를 부비며 날개 올보다 더 섬세한 울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죽음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생기로 충만한 아이들은 곤히 잠들고,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엔 달빛 그득해 달맞이꽃은 그 달빛을 받아 안으려 제 품을 한껏 열 것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달려온 달빛이 꽃잎에 떨어질 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꽃봉오리가 톡, 열리는 소리도 들리리라. 그러면 나는 아마도 수화로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말을 버리고, 손이 허공에 그리는 무늬로 사랑을 전하리라.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살아내리라. 나는 절망적으로 다짐한다. 은빛 캔의 유혹을 일거에 떨칠 자신도, 시어머니 앞에서 자꾸 닫히려는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일 자신도 없지만,
내 안의 흙탕물을 가만가만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흐려진 제 몸을 씻어 내려 목숨들을 품어 안는 강물의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