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혁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31주일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사랑하여야 한다(마르코 12,30)
로마 유학 시절, 학교에서 사순 특강으로 생태 영성 세미나를 수강하였습니다.
당시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방 안에 살아있는 식물을 키우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가르침이, 대상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식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물을 많이 주거나, 혹은 물을 조금 주거나, 햇빛을 많이
쫴 주거나, 혹은 너무 적게 쫴 주거나, 내 방식대로 사랑하면 식물에 따라 그것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법은 그 대상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상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재인용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야말로
정답(正答)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첫째요 가장 큰 계명으로 지켜야 할 사랑입니다(마르 12,30-31).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하느님이나 혹은
상대방과의 ‘인격적인 진실한 만남(체험)’에서 비롯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에 대한 앎은 바로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데서 옵니다.
또한 그 믿음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사랑,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그 대상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때, 이웃에게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때,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계명(엔톨레 ἐντολή)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말마디는 ‘사랑 실천’입니다.
통상 ‘계명’으로 번역하는 ‘엔톨레’는 왕이나 권력자의 ‘명령’을 가리키는 말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계명은 누군가의 요구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촉구하는
초대의 말마디 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우리 스스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원의’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며 살아갈까요.
대구대교구 박상혁 프란치스코 신부
2024년 11월 3일
***********
이창훈 베드로 신부
연중 제31주일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신앙 안에서 안녕하기를...”
여러분 본당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교리교사들의 신앙은 안녕
(安寧, 아무 탈 없이 편안함, peace, well)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들의 신앙의 척도를
숫자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잘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숫자가 줄어들면 청소년 사목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사목국으로 발령을 받고 처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그 숫자를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래서 청소년 사목이 잘된다는 것을 숫자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서울대교구 햇살 사목센터에 계시는 조재연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은 관계 사목(Relational Ministry)으로부터 시작되며, 관계 사목이 곧 청소년 사목의
핵심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청소년 사목을 잘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 사목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는 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글을 가톨릭 신문에 남기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숫자도 중요하지만, 관계 형성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두 가지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는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들과의 관계입니다. 분명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이웃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 중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처음에 하는 말은 “안녕하세요”와 “사랑해”입니다.
서로의 안녕과 사랑은 참 좋은 말이지만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랑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와 실천으로 결심을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이해와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서로의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안녕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통해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통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참 어렵고 힘들지만, 함께 노력한다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멘.
광주대교구 이창훈 베드로 신부
2024년 11월 3일
***********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1주일
신명기 6,2-6 히브리서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
우리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꼭 1등이 누구인지 정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 중에서도 누가 더 좋은지 선택을 강요받으며 커온 우리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일인가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한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하고 싶었던 질문을, 고맙게도,
이 율법 학자가 대신해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분명히 한 개의 정답을 바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정말 첫째가는 1등 계명이 무엇인지 깔끔한 한 개의 정답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답을 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두 개의 계명을 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두 날개가 되어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있어야만 하느님께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어느 하나만 고집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우쳐서는 결코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전설의 새 비익조는 암수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 새입니다. 그래서 둘이 몸을 꼭 붙여
껴안고, 하나 된 날갯짓을 힘차게 할 때만이 비로소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느 한쪽의 날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라는 날개와 이웃 사랑이라는 이 두날개가
마치도 비익조처럼 하나의 날갯짓을 할 때, 하느님을 향한 힘찬 비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할 뿐이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요란할 뿐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하느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혹은 어느 정도 무책임하게
“네.”라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민과 망설임을 동반한 깊은 반성과 사색이 요구될 것입니다.
아마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양심적이고 솔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날개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하나 됨의 조화를 이룰 때만이 하느님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
2024년 11월 3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