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필리피 2,1-4 루카 14,12-14
만일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를 한 끼 대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
떠올려 봅시다. 그동안 이래저래 신세를 져 온 은인들이 아닐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형제나 친척, 업무와 관련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직장 동료,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조언해 준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내가 잘 보여야 할, 또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
영업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 존경하는 스승님, 그 밖에도 사회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위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으니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또 무엇을 받을 기대감에 먼저 주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은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 뿐,
그에게 무엇을 주거나 베풀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봅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하지 말고, 오히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곧 ‘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주문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에 따르면,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그 보답을 받음으로써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답은 더 크고 유익하므로, 차라리 그것을 얻고자
현세의 보답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결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느님 나라의 보상 점수는 그렇게 계속 쌓여 갑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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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요셉 신부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필리피 2,1-4 루카 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우리가 잔칫상에 초대할 사람은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기를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끼리, 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려고
하는 사회적 흐름이 강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네들 수준과 맞는 친구들끼리는 잘 지내지만
처지가 전혀 다르다거나 자기들보다 뒤쳐지는 친구는 소위 왕따시켜버리는 경우들을 봅니다.
왕따를 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을 힘겹게 만드는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이 바른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들을 과연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그에 대하여 오늘 복음은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면서 평상시에 친분이 있던 친구들과
형제들, 또 친척들만을 초대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늘상 자기들끼리 왕래를 하면서
내가 한 번 내면 다음 번에는 네가 한 번 내는 식의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잔치에 초대했다는 자체가 아주 큰 파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와 아랑곳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지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지 말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같이 소외된 사람을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그것을 갚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주고받으며 지내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하겠는가를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편한 이웃들을 만나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극단적인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친구들과 즐길 줄만 알았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나눔이나 베풂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그리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죽은 후에도 빛이 되고 우리의 죄를 보속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 얼마나 내 것을 나누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가치관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또 가난하고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능력이 그것뿐이라고 비하하며
자기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지요.
이는 너무나 복음적이지 않은 삶의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는 우리 사회는 참으로 비복음적이며
신자들 역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며 친교를 맺는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또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당 공동체에서조차도 그들을 배척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역 사람들끼리만 모임을 만들고 친교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도 복음적이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배려하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이웃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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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필리피 2,1-4 루카 14,12-14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끌리고, 나하고 관심과
취미가 맞는 사람과 어울리기 마련입니다. 남녀가 서로의 차이를 매력으로 느껴 평생의
동지가 된 부부도 있겠지만, 그 서로의 다름이 쉽게 상처가 되고 다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하며 친교를 다지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그도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고,
밥을 한 번 사고, 선물을 줄 수 있는 여유도 그와 관계를 이어 가면서 내가 얻게 될 보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꼭 그것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위로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쉽게 끊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관계의 정석을 깨십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고 하십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조건 없는 나눔과 베풂이고,
그 사랑의 행위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들은 결코 나의 호의를 같은 방식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보답은 못해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진정한 사랑의 소통을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기심이나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돌볼 것을 바라십니다. 오늘날 혼례와 장례 때 부조를 하는 일이 마음의 진정한 표현이 아닌,
채무 형태로 바뀌는 세태를 생각하면,
내 주변에서 정말 힘든 이웃과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일이 그리워집니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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