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여자 / 조정인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짚으며 멈추는 여자가 있다
잎사귀를 따 먹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젖힌 목과 이마에
흰 갈분 같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 안쪽, 눈동자엔 더는
물상이 맺히지 않는 사람
중도시각장애자 A는 하늘을 잊지 않으려 새를 잊지 않으려
빈 동공에 거듭, 옥빛 하늘을 들이고 새를 날리지만
어둠 속에서, 어둠에 그리는 별들은 모서리를 잃어간다
ㅡ네 이름은?
그이는 지금 소리예배소에 들어 귓가에 뒤척이는 바람으로
아가위나무를 읽는 중이다 아가위나무 작은 잎들이
빠르게 바람을 팔락거려 아가위나무를 출력한다
흰 지팡이와 공명하는 바닥을 골똘하게 듣는 발이
지표면을 더듬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긴다
수피樹皮를 어루만지는 손끝이 음악을 일으키는
오월, 아침고요수목원
나무와 나무 사이 높고 고적한 비애 한 채 있다
일곱 겹, 어둠의 붕대가 발아래 흘러내린다
ㅡ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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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인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1998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웨하스를 먹는 시간』
평사리문학대상, 2019년 지리산문학상. 2021년 구지가문학상, 2022년 문학동네 동시문학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