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외 2편)
서영처
흙을 파먹고 얽히고설키는 뱀처럼 사방으로 뿌리를 뻗어나간다 노선마다 감자알처럼 맺히는 얼굴들 삶은 감자 냄새를 풍기는 인파들
거대한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듯 지하에서 더 깊은 지하로 굴러가고 굴러오고
감자탕집에서 주먹만한 감자를 먹는다 어두운 골목에서 고기를 굽는다 매캐한 연기 속 잔 부딪치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샤먼의 북소리
콘트라베이스
크고 튼튼한 가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악기는 두고 가방만 빌려달라고 했다
가죽 가방에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린 사람
촉각 경험이 풍부한 악기 가방 속에서 손길을 기다린다
굴촉성의 선율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넝쿨처럼 허공으로 뻗어갔다
그는 가방에서 늪의 비린내가 난다고 불평한다
피 냄새도 풍긴다고 우긴다
이 가죽이 틀림없는 악어가죽이라고 주장한다
똑, 똑, 똑, 가방 안에 연금된 사람을 불러낸다
눈이 부리부리한 배불뚝이 남자가 나온다
그는 계좌를 아내에게 맡겼다고
가방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눈물, 연꽃, 배임, 횡령, 사기 같은 단어를 섞으면 한 마리 악어가 나타난다
생각이 복잡한 가방 속에서 불쑥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따금 그는 독주를 털어 넣고 저음으로 즉흥곡을 뽑는다
가락은 공중을 떠다니는 차가운 바람
그가 음치라는 소문이 퍼진다
탈출에 성공한 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은신처가 되기로 한 남자
물론 나는 아직 가방을 돌려받지 못했다
* 카를로스 곤 회장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음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동물보호구역에 62세의 람 두안이 산다
펄이 자주 방문해서 연주를 한다
먼 산맥엔 바람에 해진 룽다가 펄럭이고
그만큼 해진 귀를 펄럭이며 두안은 음악을 듣는다
밀려오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긴 코를 흔들며 피아노 곁을 서성거린다
삶이 빈 요새처럼 적막으로 가득 차서 흘러나오는 선율
펄이 평균율을 치는 동안
쇠꼬챙이와 사슬이
서커스의 눈부신 조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벌목한 나무가 허리를 덮치고
두안이 제 몸에서 울부짖는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무거운 보따리를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
코끼리의 꿈이 투영된 환영 같은 날
두안은 강물인 듯 바위인 듯 생각이 많은 채로 서 있다
밀림엔 검은 피아노 한 대,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숲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저녁 속으로
두안은 신전의 기둥만한 다리를 천천히 옮긴다
밤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한 발로 서서 잎사귀를 피워올리는 나무들
코끼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시집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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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 /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 2003년 《문학/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 『가만히 듣는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