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피 2,12-18 루카 14,25-33
공관 복음에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할 때,
공통적인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우선 무엇이 나의 십자가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쉽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르는 모습 안에서 제자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예가 들어 있습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은 공사를 마칠 수 있는지
계산해 봅니다. 탑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전투에 나서는 임금은 상대방의 전력을 헤아려 싸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런 승산이 없다면 화해를 청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예시들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식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이나 전투에 나서는 임금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그것을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렇게 ‘내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것’을 지는,
‘나’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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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피 2,12-18 루카 14,25-33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 후회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결정 장애를 겪는 이유는,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일지 알 수 없거나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느냐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을 통째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나의 무능과 나약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새로운 회심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때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미심쩍어 하는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면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괜찮지만,
늘 마주해야 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살면서 서로의 약점을 뻔히 알고 있는 가족은
내게 십자가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버릴 수 없는 인연이 있고, 던져 버리고 싶은 상황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끌어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과 같은 인연과 인생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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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피 2,12-18 루카 14,25-33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사랑 문제로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부모들이 반대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담 내용도 제법 많다.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상대의 경제적 능력, 학벌, 자라온 환경, 가족사항, 연령 등등 그 가지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늘 자기 자식이 아깝기 마련인가 보다.
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주어지리라 본다.
상담을 청하는 젊은이에게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결심이 섰는가?”
보통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저하기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또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나의 답이 이어진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 그저 다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다.
그러기에 자식에 대한 욕심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너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너의 예상이 빗나갈 확률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는 너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면 밀고 나가라.
아니,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지고
행복하게 살려 노력할 자신이 있다면 결혼을 해라.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당장은 부모에게 상처나 배신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부모 역시 행복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간 선남선녀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축복 속에 결혼을 한 이들도, 그렇지 못한 결혼을 한 이들도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똑같이 열려있다.
그만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함께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둘 사이에 넘기 힘든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두 사람 각자가 옳음에 의지하려는 마음이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시작해도 사랑으로 끝을 내기 힘든 것이 한계 많은 우리네 사랑살이다.
하물며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는 부부의 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예로 들어봤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진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당신께서 맺어주신 가장 큰 인연을 버려야 한다는 무정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많은 죄를 지어온 세상이다.
사랑은 제대로 해야 사랑이다.
서로가 아름답게 살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진실을 기억하자.
부모든, 자식이든 행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한 것이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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