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필리피 3,17―4,1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집사의 행위는 그 목적과 과정과 결과 모두 부당해 보이고, 이 부당한 행위에 대한
부자 주인의 칭찬에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재산 사용에 관한 가르침으로 다가가 본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사는 우리를 뜻합니다.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재산을
관리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과 능력은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잘 관리하고 적절하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아무 계획 없이 그대로 두거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재산은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하여 쓰여야 합니다.
집사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을 위하여 쓰다가 쫓겨날 위기를 맞았지만,
나중에는 이웃을 위하여 쓰면서 칭찬을 받고 그 자리에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은 집사에게서 주님의 재산을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산이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십니다.
집사에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당장에는 집사에게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그 재산의 원주인인 부자에게 더 고마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은 이들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먼저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행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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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필리피 3,17―4,1 루카 16,1-8
오늘 복음만 들으면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신자들에게 ‘협잡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신앙 공동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의 고사성어
‘견지망월’(見指忘月)은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듣는 우리도 ‘견지망월’의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그처럼 부정한 일조차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실현에 훨씬 능숙해져야 한다는,
공동체를 향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능동적이며 적극적입니까?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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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필리피 3,17―4,1 루카 16,1-8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집사를 해고하려 하자 그 집사가 묘수를 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결백을 호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낭비에 대한 소문은 얼마간 사실인가 봅니다.
그의 계획은 집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주인과 상의도 없이 감해 줍니다.
빚이 경감된 이들이 집사의 월권 사기 행각을 알고도 동조한 거라면 공범이 되겠고,
주인의 자비로 받아들여 감사했다면 주인을 위한 그들의 축복이 하늘에 올라갔겠지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루카 16,8)
주인은 제 재산에 손실을 입게 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집사를 칭찬합니다.
낭비에 손해까지 끼친 이를 칭찬하는 주인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럿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거짓과 사기가 미화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비유 속 집사는 이 세상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본받고 교훈 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영악하고 이악스럽게 영리할 뿐,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셈법과 계산, 처세술이 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주인의 모습에서입니다. 집사에게만 집착하면 찾기 어려운 사랑이지요.
처음 집사가 낭비한 재산은 아마도 그 집사 자신을 위해 쓰였겠지만, 해고 통보 뒤에는
타인을 위해 쓰여집니다. 물론 이 역시 집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 순수한 동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이 덕을 본 건 사실이지요.
주인은 제 재산의 손실보다 가난한 이들의 무게가 덜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집사의 얕은 꾀에서 나온 처사였지만
그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갔기에 주인은 흡족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대비시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19-20)
오늘 집사는 시종일관 자신만을 위해 계획하고 움직입니다.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두고
우상처럼 섬기는 세상의 자녀답게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좋게 돌리는 분은 주님이시니, 과연 한수 위에 계십니다.
빛의 자녀는 세상의 자녀들처럼 잇속에 영리하지는 못해도 지혜롭고 슬기롭습니다.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기에 세속적 이치에 밝은 계산속으로는 범접할 수 없지요.
다만,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이 모든 걸 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빛의 자녀들의 헌신 못지않게 세상 자녀들의 열매도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쓰고 계십니다.
세속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빛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어차피 우리는 그분의 도구로 쓰일 운명이니까요.
하늘의 시민,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충실한 집사로 그분의 집을 살피고 돌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목소리를 빌어 주님께서 벗님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의 화관인 여러분, ...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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