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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나라,경주 남산 답사(6) / 열암곡
4월의 경주는 자연과 인간의 하모니로 도시전체가 화사하다. 벚꽃이 만개한 때에 경주가 가진 자연적 환경을
십분활용하여 고교 구간 마라톤대회, 벚꽃길 달리기 마라톤대회를 비롯한 스포츠행사는 물론, 각종 문화
행사가 펼쳐져 경향각처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울리기 때문이다.
열암곡을 찾은 날은 마라톤대회 관계로 시내 일부도로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통제가 없는 길로 나선 김에
때가 되면 찾으리라고 벼르고 있던 열암곡을 향해 차를 돌렸다.
열암곡가는 도로. 산악자전거로 오르는 멋진 분...
내남면과 외동읍을 잇는 904번 지방도는 남산의 최남단 도로다.서남산 내남면에서 외동읍 방향으로 가다보면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대(代)인 최준의 자형,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의사 묘역 안내판이 나온다.
이 곳을 지나 약 500m를 올라 좌측길로 접어들면 열암곡석불좌상이란 안내판이 있다.
가는 도중 길가에 간간이 서 있는 백운암이란 간판을 따라 좁은 포장길을 오르면 백운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에
접어든다.
열암곡 주차장
300여 m의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최근에 조성한 주차장이 말끔한 모습으로 반긴다.
남산주변의 번듯한 주차장이라야 통일전,삼릉,포석정,배리석불이 있는 삼불사 정도가 전부다.
이 중 삼불사를 제외하면 유료주차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용장골은 비포장된 빈 터를 마을에서 주차료를
징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단으로 조성된 열암곡주차장은 등산이나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더 없이 고맙
고 편리한 시설이다.
주차장 옆의 이정표
주차장에서 700여 m를 숨가쁘게 오르면 울창한 신우대 숲이 나타난다.그리고 숲끝에 들어서면
놀랄만할 무언가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에 발걸음은 빨라진다.
잰 걸음으로 좁은 신우대 숲을 지나면 뻗은 송림 사이로 하늘이 밝게 열린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르며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기기묘묘한 바위로 둘러 싸인 채, 얼굴에 닿는 공기마저 써늘하여 미묘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부처의
세계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허물어진 축대 높은 곳에서 열암곡 부처(列岩谷 石佛坐像)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석불좌상으로 오르는 길 왼쪽에는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4m×5m 크기의 평평한 큰 바위가 있다.
그 옛날에는 송림의 짙은 그늘 아래에서 잠시 몸을 가누고 전각과 불상을 올려보며 경배했을 것이다.
10여 조각으로 깨어져 구조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된 광배.
2007년 4월부터 약 2년간에 걸쳐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곳의 발굴조사, 석불좌상의 불두,
깨어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관계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재현함으로써 마침내 보수된 3단 대좌 위에 열암곡 석불좌상을 안치할 수 있게 되었다.
석불의 정면에는 삼릉계석불의 복원현장처럼 이 석불의 수난에서 복원과정과 오늘까지의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있다. 우리의 문화재를 앞으로 어떻게 관리보존해야 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사진들이다.
복원 전의 석불
"경주 남산 /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의 저자 윤경렬 선생은 복원된 이 불상을 생전에 보지 못하고
1999년에 타계하셨다. 선생은 당시의 파괴된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화려한 배광을 지니시고 부드러운 연꽃대좌에 앉아 기상높은 붉은 바위산을 등지고,
앞으로 흘러가는 여울 소리를 들으시며 고요히 명상에 잠겨 계시던 부처님!
지금 정경은 너무나 비참한 느낌을 준다.........."
사라졌던 불두는 2005년 10월 이곳을 답사하던 경주남산연구소의 한 여성 문화유산해설사가
계곡 아래에서 찾아내었다.
복원 된 열암곡 석불좌상(列岩谷 石佛坐像)
2,500년 전 붓다가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보리수에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며 깨달음을
외쳤던 것처럼, 우리의 석불들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높이 4m의 불상은 3단 대좌 위에 광배를 갖추고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깨달음의 손갖춤,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불상의 법의(法衣)는 편단우견이며 당당하고 풍만한 모습으로 정좌하여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채 남쪽을 바라보고 명상에 잠겨 있다.
배광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마멸되어 화려했던 무늬들이 희미하게 남아잇다.
배광전체는 당초무늬와 구름과 화불로 장엄되었다.배광가로 타오르는 불길(火焰)은 음각으로
부드럽게 새겨져 있다.
코와 입부분이 손상된 석불의 상호.
떨어져 나갔던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였다.
보상화로 화려하게 장엄된 두광
불상 전체를 바라볼 때 중대석은 여느 곳과 다른 새 돌로 되어있다.
결실된 중대석을 발굴작업에도 불구하고 발견치 못하여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불상 형식에 따라
불좌상과 대좌의 높이 비례 및 대좌 각 부분의 비례 등을 고려해 새로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삼릉계약사여래좌상이나 얼마 전에 복원된 삼릉계아미타좌상, 보리사
석불과는 달리 각 면에 아무런 조각없이 평면으로 처리해놓았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조각을 넣지 않은 깊은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고증도 없고 근거도 없는 정체불명의 현대판불상으로 짜맞추느니, 보는 이의 마음 속에 담긴 것을
눈으로 그려넣은 신라의 불상이 훨씬 더 친근하게 와 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상의 복련대석(伏蓮臺石)은 8각에 24개의 연꽃잎이 강한 입체로 새겨져 있다. 통일 신라시대 대좌의 연꽃잎
들은 대개가 한 꽃잎에 국화꽃잎 같은 돋을새김을 두 개씩 새기는데 여기서는 한개의 돋을새김으로 강조했을 뿐
이다.윗면의 중대(中臺)괴임은 3단으로 새겨졌는데,상하는 직각으로 각을 주었고 중간의 것은 곡면으로 되어
변화를 주었다.
지름 155cm되는 앙련대석(仰蓮臺石)은 부드러운 연꽃잎을 세겹으로 새긴 것이다.
48잎의 연꽃송이가 하늘을 향해 금방 핀 듯 한없이 청신하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하대인 복련은 억센 팔각에 강한 입체로 새기고 상대인 앙련은 둥글고 부드럽게 나타낸 것은, 강한 뿌리에서
부드러운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를 따랐기 때문이다.
석불의 동쪽 산사면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를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석불에서 짧은 반경 인근에 발견된 몇 개의 절터가 말해주듯, 삼국유사에서 절집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날아 가는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었다는 서라벌의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에 이곳 남산이 크나큰 일조를 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석불에서 약 30m 남쪽에는 파란 천막으로 덮어놓고 관리인까지 배치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있다.
2007년에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이다.
글쎄다... 물론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는 정확한 고증과 치밀한 검토가 뒤따라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2년이란 세월이 되도록 학술적검토를 거친 복원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너무 더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중장비를 흔하게 접하는 건설업에 종사하기 때문인 지는 모르겠으나, 70톤의 편평한 돌을 제 위치에
온전히 세우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물론 저곳은 장비의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답사길을 오르며 눈에 띈 전력공급선은 중장비가 아닌
다른 방법의 기중장치와 유압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사진)
열암곡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70톤)의 한 면을 이용하여 고부조(高浮彫)한
것이다. 발견 당시, 불상이 조각된 암석은 원래 위치에서 경사면을 따라 앞쪽으로 넘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불상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이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추가 조사 작업을 통해 불상의 대좌와 양 다리, 가슴, 및 어깨를 확인
하였다. 이번에 마침내 상호까지 밝혀냄으로써 불상의 전체 모습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 불상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cm,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cm로, 전체 높이가 560cm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5cm... 5cm만 더 내려 갔어도 불상의 상호는 저렇듯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불룩 솟아오른 부분)가 높고 민머리[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귀는 발제선(髮際線 :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등, 유사 예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불상의 수인(手印)은 왼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을 향한 채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우견편단(右肩偏袒) 형식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격이 넓어지는 옷 주름이 9개 표현되어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꽃잎을 낮게 조각하였다.
이 마애불은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비례감을 고려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잘 나타내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복원 스케치
불교조각사에서 볼 때, 이 마애불의 볼륨 있는 상호와 날카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의 수인은 통상적인 형식과는 비교되는 특이한 것으로, 지금까지 남산 왕정골
(석조여래입상)을 비롯하여 몇 예만이 확인된 바 있다.
이상의 특징으로 보아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땅 속에 거의 묻혀있는 형태로 약 1,3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손상되지 않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마애불이라는 점 또한 이 불상의 발견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남산 열암곡 마애불과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와 정비를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주인터넷뉴스 발췌>
마애불이 누워있는 바위산 동쪽을 다람쥐 같이 요리조리 암벽을 건너가며 올랐다.
산등성이를 줄지어 이어간 바위들은 더러는 선 채로 또는 누운 모습으로 남산 봉화대를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다.
이곳을 열암곡(줄지어 선 바위)이라 이름붙인 이유를 알만한 풍광이다.
윤경렬 선생은 이곳을 "새갓골"로 표현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저 바위들을 따라 오르고 싶은 곳"이라 했다...
바위산 서쪽너머로 천왕지봉(해발 433m)이 포근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감싸며 다가온다.
천왕지봉은 경주 남산의 남쪽 끝에 있는 봉우리다. 평탄한 산마루의 능선은 마치 고원을 연상케 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산이다.
남북길이 약 10km의 경주 남산을 북쪽의 "상서장"에서 출발하는 종주를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나누면
해목령과 금오봉을 지나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봉에서 그 절정을 맞는다. 솟구친 절정의 여운을 부드럽고
감미롭게 마무리해주는 곳이 천왕지봉이다. 그래서 천왕지봉은 남산의 결(結)이고 그 결(結)은 Happy
ending이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멀리 외동읍을 가는 길과 이곳으로 들어오는 노곡리 마을 길이 보인다.
경주의 시인이 쓴 두 편의 詩를 소개한다.....
산에서
- 이사가(李思柯) -
바람이 분다.
연하장에 그려진 사슴처럼
하하 언제나 싱싱하고
달 아래 얼음장 밑으로
그대 고의춤 속으로
따스한 개울물이 흐른다.
산에 오니 좋다
스님네 똥통은 더럽지만
똥보다 더러운 세상 안보고
돈 없으면 돌멩이 하나
못 구하는 도회꼴 안보니.
삭가지 꺾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아궁이에 던지고
부처님 언 법당에
불알이라도 녹이시게.
산에서
이 못난 놈도 장작개비가 되어
중생 하나 등 따시고 배부르게.
※ 이사가(李思柯) 시인의 본명은 이임수(李壬壽)다.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시인은 내 고교선배시기도 하다.
곱상하고 어질게 생긴 외모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에 맥주를 즐기는 이 선배의 시는
자아의 원상, 생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정신적 원숙성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그 특징을 두고 있다.
내 이름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은 서라벌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부질敎主(교주)라 하고
염소 우리에 지은 흙방을 부질堂(당)이라 하며
내가 즐겨 먹는 맥주는
거품이 많아 부질酒(주)라 한다.
소박한 부모님은 壬辰年(임진년)에 태어났기에
오래 살라고 壬壽(임수)라 이름지었으나
철이 들어, 스스로 ‘思柯(사가)’라 이름했다.
쉰 나이가 되어 이제는 더 이상
매이고 싶지 않아 ‘無住相’(무주상)이라 하니
덧없이 흘러가는 ‘悠悠(유유)’와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부질없는
욕망의 껍데기들이 아닐까 보냐?
이름도 성도, 내 몸뚱이도
마냥 흘러가는 구름이요,
부질없다는 말조차도 바람인 것을 말이다.
- 2002. 5 . 사가, 自序를 대신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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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너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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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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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우~욱 읽어보니 세상너머님 경주사랑에 깊은 감동만 자아낼뿐 입니다.일전에도 열암곡 마애불 복원에 많은 어려움이 제시 되었지만..현재 국내의 과학적인 장비는 기술상 일본에 뒤진다하여 말씀하신 에어공법 장비 일부를 일본에서 공수하여 하기로 했는데...어딜가나 재정적인 면에는 인색하지만 거품이 넘 많다하여 주춤하고 그곳 초기 담당자는 곤욕을 많이 치뤘는줄 알고 있습니다.
강녕하십니까... 저렇듯 방치해야할 이유가 분명있겠지요. 담당하시는 분들도 빠른 복원을 바라고 계심은 당연지사구요. 문화재관련 예산집행의 우선순위와 적재적소의 운용이 융통성있게 이루어지길 기대해봅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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