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시즌이후 10년만에 프로야구판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아마의 대형신인들이 대거 입단하며 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93 시즌은 사상 처음으로 4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93년에 불어닥친 프로야구의 열기는 94년,95년까지 이어지며 95년에는 540만 관중동원을 기록하며 절정에 이르게 된다.
92시즌을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원년멤버들이 유니폼을 벗은 가운데 93 시즌에는 대형 신인들이 무더기로 입단하며 자연스레 세대교체를 주도하게 된다.
1. 대형 투수들의 대거 입단
93 시즌 신인 가운데 최고 계약금을 받은 선수는 서울고-고려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한 좌완 대형 투수 이상훈 이었다. 아마 시절에 동기생 구대성,김홍집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졌으나 대학 4학년 시절 14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단숨에 서울 연고팀 LG와 OB의 스카우트 0순위로 급부상하게 된다.
결국 주사위 추첨에서 우선권을 따낸 LG가 이상훈을 낚는 행운을 잡게되고 OB는 '울며 겨자먹기'로 건국대의 4번타자 추성건(서울고 - 건국대)을 지명하게 된다.
이상훈은 좌완 투수로선 드물게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구사하면서(일반적으로 좌완 투수의 직구는 우완 투수의 직구보다 타자들에게 5km정도 이상 빠르게 느껴진다.) 대형투수로 주목을 받게 되는데 92년 정민태가 받았던 최고 계약금을 1년만에 경신하면서(1억 8천 8백만원) 사상 처음으로 2억원대 신인(연봉 포함)이 된다.
입단 첫 해 성적은 9승 9패라는 다소 평범한 기록에 그쳤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팀이 2연패로 몰린 순간에 적지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그의 진가를 과시하게 된다.
또한 성적 외적인 측면에서 볼때 그의 입단은 대형 투수를 갈망하던 LG팬들의 폭발적인 기대를 불러 일으키면서 관중동원에도 적지않은 공헌을 하게된다.(당시 LG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홈구장 100만 관중을 돌파한다.)
국가대표 좌완 쌍두마차 구대성(대전고-한양대)과 김홍집(인천고-단국대)또한 빙그레와 태평양에 억대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는데 입단 첫 해에는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지만 이후 팀내 좌완에이스로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동대문상고 시절 팀을 이우수(전 LG)와 함께 고교최강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았던 우완 정통파 투수 김경원(중앙대 중퇴)은 입단 첫 해 OB마운드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며 9승 3패 23세이브 방어율 1.11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
2.'야구천재'와 '괴물타자'
92 시즌에는 신인투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면 93 시즌에는 신인타자들이 프로야구판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활약을 선보이는데 그 주역은 '괴물타자' 양준혁(삼성)과 '야구천재' 이종범(해태)이었다.
대구상고-영남대를 졸업한 양준혁은 원래 92시즌 쌍방울의 2차 1순위로 지명을 받았지만 평소에 동경하던 삼성에 입단하기 위해 일부러 상무에 자원입대한 후 1년뒤 삼성에 입단하게 된다.
국가대표 출신의 대형타자인 그가 92시즌 삼성에 1차지명을 받지 못한 배경은 양준혁의 의리있는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짝친구였던 김태한에게 그는 1차지명을 양보하고 본인은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고 군에 입대한 것이었다.
1년을 기다린 끝에 단짝친구인 김태한과 한솥밥을 먹을 수 있게된 그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괴력을 과시하며 0.341의 타율로 장효조 이후 처음으로 신인 타격왕에 오른 것을 비롯 홈런 2위(23개),타점 2위(90점)에 오르면서 정교함과 장타력을 겸비한 타자로서 각광을 받는다.
메이저리그 선수같은 당당한 체격에 독특한 타격폼으로 '괴물타자'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그동안 장효조,류중일 같은 대형 신인들을 배출하고도 한번도 신인왕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던 삼성에서 사상 처음으로 신인왕 타이틀 홀더가 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광주일고 - 건국대를 거쳐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은 입단 첫 해에는 공격보다는 수비와 주루 플레이에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김재박-류중일로 이어지는 대형 유격수 계보를 이어받을 만한 선수로 각광을 받은 그는 강한 어깨를 이용해 유격수-3루수간의 웬만한 깊은 안타성 타구는 범타로 처리할 정도로 뛰어난 수비를 과시하였다.
팀선배 이순철을 제치고 톱타자 자리를 차지한 그는 무려 73개의 도루(2위)를 기록하며 재치있는 주루플레이를 선보였다. 또한 16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장타력도 만만치 않음을 과시하였다. 그의 팬들을 매료시키는 화려한 플레이는 훗날 그가 선동렬과 더불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는데 원동력이 된다.
비록 신인왕은 라이벌 양준혁에게 내주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양준혁이 속한 삼성을 격파하는데 일등공신으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는 영광을 누리면서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한다.
3. '흙속의 진주' 박충식
광주상고-경희대를 나왔으나 연고구단인 해태의 지명을 받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던 잠수함 투수 박충식은 당시 삼성의 이문한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삼성에 2차 4순위로 입단하게 되는데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맹활약을 펼치며 돌풍을 일으킨다.
잠수함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140km대의 강속구를 구사하며 특히 타자 앞에서 옆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던 그는 14승 7패 2세이브 방어율 2.54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신인투수중 최고의 성적을 거둘뿐만 아니라 삼성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를 야구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경기는 다름아닌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이었다. 최고의 투수 선동렬과 맞대결을 펼친 그는 무려 181개의 공을 던지며 15회를 혼자 책임진다.
비록 승부는 2-2로 가려지지 못했지만 아직도 많은 팬들의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그의 투구는 인상적이었다.
4.명암이 엇갈린 두명의 고졸 투수
93시즌에도 주목을 받으며 입단한 두 명의 고졸 투수들이 있었는데 공주고를 졸업하고 빙그레에 입단한 노장진과 진흥고를 졸업하고 해태에 입단한 이대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주고를 당시 전국최강으로 이끌었던 노장진의 지명도가 이대진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러나 프로에 들어와서는 두 선수의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데 이대진은 10승 5패 2세이브 방어율 3.11이라는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면서 팀의 우승에 일조를 하지만 노장진은 승운이 따라주지 않는 불운이 겹치면서 기대와는 달리 3승10패 3세이브 방어율 4.41의 저조한 성적을 남기면서 시즌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