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사랑-되기로의 초대
김희정의 회화에는 심리적 밀도가 있다. 이 밀도는 응시를 깨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지만, 또 우리 안 또 다른 눈과 마음이 보며, 그림의 표면 너머에서도 우리를 본다. 거기엔 무의식적 매혹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라캉에 오래 심취해왔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라캉의 개념, 모티브, 이론적 체계가 그림 자체의 분위기나 느낌, 형식의 미적 계기가 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 제시된 오브제들은 이미 정신분석적 의미로 물들어 있다. 라캉에 머무른다면, 그의 그림은 타자의 응시의 장소, 무의식의 결여를 은유하는 끝없는 환유의 굴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김희정의 회화에서 그것의 정신분석적 의미를 캐낼 필요는 전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그림은 정신분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다. 그는 이제 라캉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제 라캉이 말하는 욕망을 영원한 결핍이나 부재의 드라마로 보기보다, 오히려 무엇인가 생산되는 것, ‘되기becoming’의 사건, 어떤 변용태affect가 되어 가는 정동적 사건으로 바라본다. 이 되기의 사건은 이질적인 만남이고, 잠재적 이질성이 만나 새로운 존재 역량과 상태가 발현하는 순간이다. 욕망은 결핍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반대로 변형, 변이, 차이, 생산이다. 부리오의 말처럼, 그림도 만남의 상태다. 그림은 김희정과 만나지만, 관객 모두와 만난다. 만남은 단지 결핍의 무의식이 자신의 대상을 응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결핍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건 기억이건 관객의 잠재적 세계와 만나 그들의 되기를 강요한다.
김희정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상,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이미 노스탤지아가 된 대상들을 소환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즐겨보던 영화의 장면을 불러내 되기의 욕망을 회화로 무대화한다. 그의 그림 안에서 그도 되고, 우리도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일어나는 회화의 되기는 헐리웃 배우-되기다. 오해할 필요는 없다. 김희정이, 내가, 관객이 비비안 리나 오드리 헵번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헐리웃 배우-되기는 동일화도 아니고 재현의 문법과도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림 안에서 배우와 우리 사이, 그 배치 안에서, 그림이 그것과 만나는 사람과의 수많은 배치 속에서 그들 각각의 무의식적 되기와 정동적 변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은 김희정과의 관계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고, 나와의 관계에서 다른 역량을 발휘하며 다른 것이 된다. 그림도 우리도 모두 다르게 된다. 그의 그림에 진하게 묻은 노스탤지아 감성은 그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소화될 때마다 우리를 다른 되기와 역량, 상태로 이끄는 특이성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되기가 일어나는 무대이자 장소, 그것의 배치물이다.
그는 그 ‘되기’의 정동적 사건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일반성을 표현하는 말이고, 되기의 가장 일반적이고 극적인 형태로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행위만큼 우리를 극적으로 변용하는 사건이 있는가. 사랑만큼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드는 게 있는가, 사람들은 그런 되기의 경험을 ‘이야기’, 즉 일화 기억의 형태로 저장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 김희정 자신의 사랑-되기의 이야기, 자신의 무의식적 자아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림의 일차 관객은 언제나 화가 자신이니. 하지만, 예술가인 그는 자신의 그림 무대에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이 의식적 자아에서 탈주해 사랑-되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김희정이 탐험했던 욕망은 이제 사랑-되기로 승화됐다. 그의 여정에 동참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그림이 주는 느낌에 슬쩍 빠져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조경진(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