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문제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욥기는 언제나 문제라는 것이 어떠했으며 지금은 어떠하며 앞으로 어떠할 것인지를 비춰준다.
물론 문제들은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때 다 사라질 것이다. 일들이 잘 풀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어려운 일들과 고난이 찾아오면 이 세상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재난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잔인하고 엄한 분이라고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문제들과 대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욥이 언급하는 내용은 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이 비록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한다.
따라서 욥은 내내 두 가지에 대하여 담대하게 선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과 자신은 결백하다는 사실이다. 욥은 자기에게 발생하는 사건의 발단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 지점으로 선택된 사실을 모른다. 사탄의 논쟁은 사람이 하나님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9). 즉 사탄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시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이 자기가 욥이 누리는 축복을 저주하는 것을 허락하시면 욥은 반드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탄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빈정거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넣고 사탄의 제안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의 빈정거림이 거의 맞을 뻔한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는 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 그러나 가장 악한 일들이 내게 발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실 때 나는 “괜찮습니다. 주님!”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요점은 “순전하고 정직한” 욥과 같은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영예가 그에게 걸려있었던 것처럼 고난을 당하는 자의 어깨에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문제는 사탄이 하나님과 흥정을 할 때 하나님은 빠지셔야 한다는 점을 암시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욥에게 한번도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논쟁에 있어서 사탄은 모든 조치를 다 취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신을 증명해낼 때까지 욥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갈 때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친구와의 논쟁은 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럼에도 욥은 그 고통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다. “발생하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성품과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야보고 사도는 “욥의 인내”에 대하여 말한다. 욥의 인내! 욥은 인내하였는데 오직 하나님께 인내한 것이다. 욥에 관한 한 아무 것도 논리적이지 않다. 욥의 말은 거칠고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욥의 말의 저변에는 욥이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멸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확신하였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저주하며 더욱 멀어질수록 욥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있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끝까지 서 있는 동안 욥의 친구들은 욥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7). 참된 종교를 지켜주는 성벽은 상황과는 관계없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머무는가? 성경은 신체적 고통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현대인들은 고난과 아픔을 저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을 정결케 하는 수단으로 본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1). 우리에게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은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발생하는 비통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영혼의 번뇌를 광신이라고 업신여겼다.
전통적인 믿음이 내 자신의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 말해 보라. 고난이 없이는 그것 중 어느 것도 당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욥을 시험한 것처럼 사탄이 모든 덕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섣부른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가 당신에게 의심하는 덕은 아직 시험되지 않은 덕들이다. 시험되지 않은 믿음은 단지 약속이며 가능성일 뿐입니다. 이 믿음은 여전히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시험을 거친 믿음은 정금과 같다! 믿음은 시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 가치가 없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영예를 지켜낸 믿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를 기억하라.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욥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유는 물질적 풍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영적인 성품, 곧 거룩한 성품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시간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욥 42:10, 12).
욥기의 결론을 두 배의 물질적인 축복으로 내리면 욥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욥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다름 아닌 욥의 확신이 외부적으로 확증된 것이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을 향해 달음질하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서는 한량없는 은혜로 채우신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중에서
번역: 스데반 황
첫댓글 의롭다고 자부하는 내가 없어져야 온전한 구원의 길이 열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