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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The seed sown on rich soil and understands it, and yields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당신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신탁은 유배의 끝을 알리고,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의 재건을 예고한다. 이제는 계약의 궤도 필요하지 않다. 예루살렘이 ‘주님의 옥좌’가 되기 때문이다. 패망한 도시가 천상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 공동체적인 극적 갈등 안에서 실현된다.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결실을 낸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자기의 마음 밭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키워 낼 줄 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 밭에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씨앗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 밭을 잘 일구어 싹을 틔우고,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 밭을 잘 일구지 못한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 오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또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씨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끊는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때로는 가야 할 장소이고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혹도 많습니다. 힘이 부치면 즉시 ‘태클’을 걸어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결심하고도 무너졌는지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 어떤 것이 좋은 땅일까요? 유혹이 없고, 삭막함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땅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장애 요소를 만났기에 더욱 기도했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생태적 예수 - 이동훈 신부-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 주의 컴버미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마돈나 하우스 (Madonna House) 라는 공동체의 본부가 있다. 이 공동체의 창립자인 러시아 출신 캐서린 여사는 1947년 농장을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세웠다. 그녀는 공동체가 농장을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동물을 잡을 때 어디를 잡을까요? 생각해보면 동물마다 잡는 부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어디를 잡을까요? 귀를 잡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귀가 아닌 목덜미를 잡아야 합니다. 도마뱀은 어떻습니까? 만약 꼬리를 잡는다면 잘려진 꼬리만 손에 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동물마다 적당한 부위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 동물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사람을 잡으려면 어디를 잡아야 할까 라는 의문을 던져봅니다. 즉, 사람의 어느 부분을 잡아야 내 편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과연 사람을 잡을 때 어디를 잡습니까? 정답은 ‘마음을 잡아야 한다.’ 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잡기보다는 서로 멱살을 잡아채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비어 있는 마음, 이렇게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만이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길과 같은 마음,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실천하지 않는 돌밭과 같은 마음,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이러한 마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에만 주님으로부터 내 마음을 온전히 잡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의 마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과연 나의 마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열매를 그리고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성들을 통해 내 마음은 점점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주님께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은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고, 영혼은 우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세실 박스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김 맛세오 수사-
성거산에 살면서 나무 작업을 많이 합니다. 수십 년 아름드리 소나무들 주변에 담쟁이 넝쿨하며 가시가 달린 넝쿨 식물이 제법 많아, 아무리 키 큰 소나무라도 타고 올라가 얼기설기 감아 버리면 소나무의 멋진 가지들은 맥을 못추고 우리네 삶이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결국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환히 열려진 파아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라는
말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박경철 의사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 강의 내용 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는 ‘W’, 곧 웹에 대한 강의를 했다. 머지않아 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한 것 이다. 90년대 초의 이야기인데, 강연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 다.’며 강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수 친구는 W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W가 말하는 세상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메일링 서비 스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W는 2조 벤처 기업의 대표가 됐고, 백수 친구는 사업을 시작해 결 국 테헤란로에 빌딩을 세 채 소유한 유력한 기업인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이런 반성을 했다. ‘나는 왜 W와 백수 친구가 본 것을 볼 수 없었던 걸까?’ 적 인간과, 0.9%의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은 수동적으로 이를 따라왔을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답이 확실해진다. ‘W’는 0.1%의 창의적인간 이었고, 백수 친구는 0.9%의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99%의 수동적인 ‘잉여인 간’이었다. 아보니 그랬다. 경제사만 놓고 봐도 그렇다. 계가 있나보다.’ 했는데, 일부는 모직의 재료가 되는 양털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감지하 고 감자밭을 뒤엎어 양 목장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모직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양 목장주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기차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포드는 자동차의 유용함을 확신했고, 그를 W로 알아본 사람이 있 었다. 바로 록펠러다. 그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주유소를 만들기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라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 고, 그 사업에 협력한 록 펠러는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보았는데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는 짓 한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네. ...’ 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 매,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백배 예순배 서른배로 낼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분심 없는 들음 -김찬선신부- 이런 경우는 하늘나라에 관한 듣지 못하는 세 가지 유형 중에,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철을 타면서 예전과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노약자석의 정확한 분리라는 것이지요. 노약자석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들만 있고, 일반석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젊고 늙음의 구분이 이 전철 안에서 확연하게 구분되면서, 마치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노약자석이 없었던 몇 년 전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는 연세 드신 분이 전철을 타시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리를 내어 드렸지요. 그러나 이제는 노약자석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 앞에 연세 드신 분이 있어도 자리를 내어 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즉, 나이가 많으면 자기에게 오지 말고 노약자석 쪽으로 가라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떤 중년의 형제님께서 자신의 앞에 있는 여학생의 가방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학생, 가방이 무겁지? 내가 들어줄게.” 그러자 그 여학생은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바라보면서 “됐어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전에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서있는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머리 위까지도 가방을 들고서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방을 들어준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세상인가 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따뜻한 인간미보다는 보이지 않는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많아진다는 뜻일 텐데,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일까요? 따라서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다시 새롭게 심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사랑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 안에 받아들였으면 이제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제거하고, 사람이 좋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바로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 양보도 해보고, 무거운 사람의 짐도 좀 들어주고, 만약 목욕탕에 가신다면 모르는 사람의 등도 밀어주는 등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을 해보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너무나 좋아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남들 앞에서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유리하게 바꿔 보자고 생각한 뒤에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엔도 슈샤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양승국신부- <깨달음의 행복>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 행운들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은 아무래도 ‘깨달음’이란 행운이 아닐까요? 삶의 전환점, 삶의 기폭제가 되는 깨달음,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 해주는 깨달음, 그간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게 해주는 깨달음,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깨달음, 우리 삶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는 깨달음...이런 깨달음은 돈 주고도 못사는 정말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아무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깨달음이란 내 인생 안에 새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허무는 일입니다. 낡고, 비좁고, 비새고, 배관도 엉망이어서 냉난방도 안 되는, 그래서 더 이상 거처할 수 없는 낡은 옛집을 과감하게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기존의 그릇된 사고방식, 오류와 아집, 교만으로 가득 찬 옛집을 허무는데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깨달음을 통해 소중한 인생의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다 끝난 것은 또 아닙니다. 발견한 진리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원칙을 살아내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저 좋다 좋아, 하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투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길, 새로운 이정표, 새로운 삶의 대원칙을 발견한 행운아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은 그분이 사신 것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자취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으로 그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은총에 도달한 사람으로서의 자세이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삶의 폭, 삶의 지평이 광대해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놀라울 정도로 관대해집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 앞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크게 깨달은 만큼 큰 그릇이 되어 삶의 모든 국면들을 관대하게 수용합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습니다. 미움덩어리인 사람도 그저 안쓰럽고 측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인생의 역풍 앞에서도, 먹장구름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여유가 생깁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내 안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힘겨운 삶의 순간들도 사랑으로 엮어갈 줄 압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때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셔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우리의 노력은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황지원 신부-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저에게 하느님의 넓은 품을 다시금 바라보게 합니다.
깨달음 2 - 박후임 목사-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어 행복해하는 제자들에게 들을 수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신다 . 비유로 들어주시는 길가·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공통점은 모두 땅이다 . 땅은 하늘의 짝이다 . 하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땅으로 내려왔는데 그 땅이 단단하고 돌이 많거나 가시덤불이 무성하다면,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 네 가지 마음 밭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하늘말씀(씨앗)을 통해 내 안의 단단함, 돌, 가시덤불을 보고 그것들을 치워 하느님이 원래 만들어 주셨던 좋은 흙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닐까?
비옥한 땅, 겸손한 마음 -전삼용신부-
어제 병원에서 치아 신경치료를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금으로 때운 곳이 아파서 열어 보았더니 그 안이 썩어가고 있어서 신경을 죽이고 금으로 새로 씌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치아에 신경이 몇 줄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하나가 썩은 것은 확실하고 나머지 신경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일이 찔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치료대 위에 누워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워서 따끔따끔한 고통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신경을 더 긁어낸다고 하였습니다. 전번에 느꼈던 고통 때문인지 처음부터 더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고통을 줄 것 같아서 더 긴장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절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 졌습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게 하는 기계를 제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위를 볼 수 없었고, 그렇게 입을 한 시간 동안 벌리고 있으면서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첫 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치료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마취를 할 때, “좀 따끔 할 겁니다.”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지만 그런 말 하지 않을 때도 자주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아! 내가 느끼는 고통의 90%는 내가 상상하는 것에서 오는구나!’입니다. 실제로 의사를 믿고 내 자신을 맡겼다면 한 시간 내내 긴장하면서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치료 받는 한 시간 동안 미리 예고 된 두세 차례 짧게 따끔 했던 것을 제외하곤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곧 의사 선생님을 믿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다고 할 때만 긴장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참기가 수월하였습니다. 내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가 의사가 되어 내가 상상하고 그래서 긴장을 하고 있을 때는 참 힘들었지만, ‘그래, 어차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기니 편해졌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무엇을 깨달아야 삶이 바뀌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성경 구절을 듣고 묵상해도 ‘진정 깨닫지 못하면’ 삶이 바뀌지 않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땅, 바로 겸손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교만을 버릴 때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깨닫고 믿어야 삶이 변화됩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할 때 결혼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라는 말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냥 들으면 별것 아닐지라도 저는 ‘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참아내야 할 것이 있는 거구나! 그러면 나는 인간적인 애정을 참아내는 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삼고 살아야겠다.’라고 깨달았고 그것으로 신학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성경 구절이 깊이 다가와 ‘아!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즉 기도만 하면 그 분으로부터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 내 안에 저절로 성령으로 가득차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구나!’라고 깨닫고 기도에 목숨을 건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임을 믿게 되었고 사실 그렇게 해 보니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씀을 듣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도 않고, 또 모든 사람이 기도에 목숨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겸손히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삶이 변화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어도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는 마음이 겸손한 땅이 아니면 아무리 그 마음 안에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깨닫지 못하고 삶도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갈고 거름을 주어 씨를 뿌리기에 적당하게 만들지 않는 농부는 없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그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믿고 받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겸손한 좋은 땅만 있으면 말씀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 밭 -김찬선신부- 자주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새벽을 열며 얼마 전에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서 성인 남녀들을 대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그런데 조사대상의 66.9%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쓸모없이 뿌리시지는 않는다 -남상근 신부- 얼마나 아까운 씨앗인데 씨 뿌리는 사람은 함부로 뿌립니다. 백 배, 예순 배, 열매 맺는 삶 -임인자- 얼마 전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우의 자녀 결혼이라 당연히 성당에서 하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관면혼배만 하고 동네에 있는 호텔에서, 그것도 주일 12시 30분에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날이 길일이고 시간이 그때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사 후 서둘러 결혼식장에 갔더니 주례도 신부님이 아니라 다른 분이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열매 -여성국 신부 -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한 사람
하느님 탓? 아니며 내 탓? -상지종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수요일에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좋은 땅 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에 씨를 뿌립니다.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좋은 땅만 가려서 뿌리면 낭비하는 씨가 하나도 없이 모두 많은 열매를 맺을텐데,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은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이제 이 말씀과 은총이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씨가 땅에 심어져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가지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뙤약볕 아래서 무수한 땀을 흘리면서 추수의 날을 준비하듯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내야합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에 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해서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순간 반짝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잘 가꾸어 갈 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권이 당첨되어, 아니면 땅 값이 갑자기 올라서,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는 결코 이러한 요행수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만약 어떠한 요행수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원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열매맺게 하는 좋은 땅이 아니라, 길바닥이요 돌밭이며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녕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며,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작은 일들에 충실할 때 우리 모두는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복된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도 실패할 때가 많았고, 신자들의 생활을 살펴보아도 부실한 면이 많은 쓰라린 현상을 체험한 곳이다. 믿음이 사라져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 있던 공동체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복음이 형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 이영창 신부 -
오늘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러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씨 뿌리는 이'에 견주고 있습니다. 씨는 바로 기쁜 소식 즉 ‘복음(福音)’이며, 여러 가지 밭은 그 말씀을 듣는 ‘여러 청중’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결과(열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의 결과는 듣는 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같은 씨(말씀)가 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뿌려지지만,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옛 것을 고수하려는 마음, 새 것을 덮어놓고 싫어하고 위험시하는 근시안적인 자기폐쇄,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교만과 자아도취,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소경으로 만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졌으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사탄이 낚아채가서 냉담해 버리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세례까지 받았지만 얼마 뒤 “성당에 다니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하면서 완전히 세속 생활로 빠져버려 하느님과는 이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얄팍한 인생관을 가진 자로서,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덮어놓고 좋아는 하지만, 즉시 싫증을 내고 끝을 맺지 못한 채 도중에서 그만둡니다. 그들은 시작하는 것은 많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쉬 더웠다 쉬 식어버리는 자들입니다. 즉,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왔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경우인데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실제 자신에게 위기와 화가 닥쳐오면 이내 얼굴을 바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이익으로 계산하게 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봤지만 너무 힘들어. 달라지는 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이내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마치 두 주인, 아니 셋 넷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에 분주하여, 참다운 가치관을 터득치 못한 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여기에 속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 일에 바빠, 기도하는 시간도, 성경을 읽을 틈도, 성당에 나갈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밀어냅니다. 마지막 부류는 옥토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언제나 배우려 듭니다. 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듣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친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도덕적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어갑시다. 주님의 씨앗으로 말입니다. 마음 밭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영육(靈肉)의 최고 치유제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영육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 밭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지면 도저히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데는 왜 그리 소홀한지 모르겠습니다.
곧 잡초 우거진 거칠고 굳어버린 밭이 되듯이 마음 밭도 냉담으로 방치하여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곧 거칠고 어둡고 차갑고 딱딱한 마음 밭이 됩니다.
때로는 돌밭 같은 때도,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수행이, 말씀 공부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 밭의 현실에 개의치 말고 늘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행하는 노력이 있을 때, 점차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바뀌어 갑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 볼 것이다.”
참 스승이자 착한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마음 밭을 좋은 땅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풍부한 말씀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가8,15)!” 아멘.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초라한 인생의 결실 앞에서> 이것 저 것 작물들을 잔뜩 심어만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 않는 제게 한 전문 농부께서 이렇게 ‘뼈있는’ 충고를 하셨습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크는 법이라네. 틈만 나면 자주 가봐야혀.”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섞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약을 치고, 잡초를 뽑아주면서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은 어찌 보면 농부에게는 자식, 혹은 분신과 다름없습니다. 이번 수해로 한 순간에 그 ‘아까운 것들’ 다 날렸을 뿐만 아니라, 논이고 밭이고 살아갈 터전이고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려 망연자실해있는 농부들의 그 허탈한 마음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오를 뿐입니다. 주님의 위로에 우리의 위로가 보태져서 그분들, 조금이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해복구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주민들의 말씀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오셔서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많은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께 해주시니, 따뜻한 마음 보여주시니,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에,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마음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유난히 제게 크게 다가옵니다. 불과 서너 달 전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호박 모종 몇 개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넝쿨이 자라나 꽤 큰 언덕을 다 덮고 있습니다. 큰 호박잎 밑 비밀스러운 곳에는 축구공보다 더 큰 호박덩어리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이른 봄 제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던 가냘픈 깻잎 모종 조금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자라고 자라서 제 키 만해 졌습니다. 그간 따먹은 깻잎만 해도 리어카로 몇 리어카는 될 것입니다. 가지, 고추, 상추...꽤 쏠쏠한 재미를 봤습니다. 제대로 된 결실을 맺은 작물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고맙습니다. 반면에 그렇게 ‘쌩고생’하면서 돌보고 키웠는데 전혀 협조하지 않고 수확은커녕 말라비틀어져버린 작물들을 바라보니 화가 날 뿐입니다. 모종 값만 해도 얼만데...하며 본전 생각이 납니다.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주인이시자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탐스런 열매를 가득히 맺는 인생 앞에 하느님께서는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전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생 앞에서 하느님께서도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나는 이 한 세상 살아오면서 별로 이룬 것도 없고, ‘이거다’ 하는 결실도 없는 초라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쩌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타고난 토양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결실도 다릅니다. 주어진 그릇이 다르기에 수확의 양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류 발전을 위해, 타고난 달란트를 바탕으로 한 생산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실만이 다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결실, 기도의 결실, 희생의 결실, 인내의 결실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타고난 이 세상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도 나름대로의 결실을 거두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있어 결실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만 해도,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결실입니다. 우리 각자의 나날 안에서, 우리 각자의 오늘 처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무가 열매에 의해서 구분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결실을 통해서 -김태환 신부-
비유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 -박상대신부-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관한 현실감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려웠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라고 했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는 곧 하느님 존재의 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눈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이는 갈수록 어떤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이탈해가고, 심오한 것을 마치 미신(迷信)으로 여기듯 하는 현대의 우리들이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 중에서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미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밝혀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사실은 비유설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겠으나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우선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福音)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복음선포자이다. 그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네 곳으로 언급된 바 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서 선포되는 복음말씀을 듣는 청중과 그 청중의 내적 조건을 의미한다. ①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의 밥이 된다고 했다. 길바닥이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를 말하며, 이 때 그 씨앗을 먹어치우는 새는 악한 자, 즉 사탄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청자의 마음 밭이 세속적인 지식이나 교훈, 과학이나 철학이념으로 다져져 있어 복음을 받아들여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떤 마음의 바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씨를 쪼아 먹는 새에 비유된 사탄인 셈이다. 사탄은 곧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 살고 있는 교만이나 자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씨앗의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돌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이다. 강한 햇볕 속에서 피운 싹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마음속에 내리지 않아 그 말씀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는 경우이다. 복음말씀과 신앙 때문에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③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도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다고 하여 걱정과 유혹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런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것을 향유하면서도 집착과 과욕을 제어하고 천상의 것에 대한 감각을 늘 유지하고 성장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④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좋은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좋은 토양은 복음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의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모두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우를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그 뿌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견디어 내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돌밭과 가시덤불 속의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볕과 알맞은 수분이 토양과 더불어 훌륭한 가실(佳實)을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좋은 땅이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이 결코 열매를 맺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비유 속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유의 설명 속에서는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들과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층의 절벽에서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 있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이유이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켜 고정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환난과 핍박과 박해의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온갖 걱정과 유혹거리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선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신앙에 항구하고 지구(持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매를 맺는 일에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좋은 땅(마태 13,18-23) - 유 광수신부-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씨가 길에 뿌려진 이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우리 나라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는데 왜 사회는 점 점 더 악해지고 있을까? 카톨릭 신자들만도 2백만명이 넘고, 개신교 신자까지 합하면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수효는 우리 나라의 3분의 1은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성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부정과 부패, 살인과 폭력, 음란과 사치, 물질적인 탐욕과 이기주의 등이 그 도를 더해 가고 있다. 오히려 옛날의 따뜻한 마음과 친절 그리고 양심적인 생활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고 삭막함과 서로간의 불신, 이혼과 마약 등이 우리 사회를 물들여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토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일이면 미사 참례하고, 예배를 보고, 아침 저녁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성직자, 목사, 수도자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복음적이지가 못할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을 때에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지성, 활동이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늘 나라에 고나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뿌리가 없으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면 결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직 좋은 땅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취약점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음이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 없이 듣는다. 아니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봉사한다고 나서고, 기도한다고 앉아있고, 바쁘다고 여기 저기 다닌다. 내가 시골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 한 형제가 아침 식사 때에 와서 "신부님, 밭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였다. "무슨 밭이 없어져?"라고 물으니까 "봄에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 밭이 없어졌어요."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밭이 어디갔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는 하나도 자라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랐어요."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 놓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 고구마 싹이 나오기도 전에 풀이 자라서 고구마 밭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밭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독서> : 십계명의 비밀 : 당신은 복받은 약속의 백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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