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리(倉洞里)는 동쪽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고려 말부터 조창(漕倉)이 있어 창골 또는 창동이라 불렀다.
당시 조창의 이름은 경원창(慶原倉)과 덕흥창(德興倉)이었고, 창동리에는 자연마을로 갈마, 담바우가 있다
갈마는 마을 뒷산에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갈마(渴馬)’에 점 하나를 떼어내면 ‘갈미’가 되는 것.
이 나즈막한 4봉우리들(수용골산·삼봉·갈미봉·백중산)이 아무데고 유래를 찾을 수 없어 하는 말이다.
다만 카카오맵에서 4봉우리의 이름이 보일 뿐이다.
남한강에서 바라볼 때 두 능선이 뻗어내린 산세가 풍수지리상 '좌청룡우백호'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용골산이 좌청룡, 백중산 능선이 우백호, 그 골짜기는 '수용골'로 용(龍)이 사는 곳.
그래서 좌청룡의 끝자락에 뭉툭 솟은 산인 '수용골산'을 '水龍谷山'이라 이름하였고, '백중산'을 감히 '百中山'이라 명명하였다.
‘탄금대(彈琴臺)’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
‘대문산(大門山)’106.9m)‘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신라 진흥왕 때(537) 가야국의 악성 우륵(于勒)이 망명의 한을 달래기 위해 가야금을 타던 곳이자, 임진왜란 때 신립(1546-1592) 장군이 왜적과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곳이기도 하다.
우륵이 이곳 절벽 바위를 집으로 삼아 가야금 타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내자 그 오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탄금대가 된 것.
탄금대에는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 신립 장군 전적비, 탄금정, 충혼탑 등이 있다.
이 산 언저리에는 국보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있다.
원점회귀하는 곳에 ‘중원 창동마애불(충북 유형문화재)’이 있고, 가까이에 ‘창동리 오층석탑(지방 유형문화재 제8호)’과 ‘창동리 약사여래입상(충북 유형문화재 제271호)’이 함께 있다.
내킨 김에 만사 제치고 3km 남짓의 거리에 있는 국보부터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바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이다.
현전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거대한 석탑으로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남한강 옆 언덕 위에 높이 14.5m 화강암제로 우뚝 서 있다.
편리한 대로 게시판을 따로 나누어 올렸다.
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1)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답사한 뒤
2) '수용골산' 원점회귀 지점인 '중원 창동 마애불' 입구(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39-9)에 버스를 댔다.
3) 버스 이동한 뒤 '탄금대(대문산)'
◇ 삼봉(276.5m),갈미봉(275m),수용골산(225m),백중산(180.6)
* 창동리 오층석탑, 창동리 약사여래입상, 중원 창동마애불 답사.
산행코스: 마애불입구-굴다리-수용골산-삼봉-임도-갈미봉-도로-백중산-농장-창동리 오층석탑·약사여래불·마애불(약 7km,3시간)
◇ 탄금대(대문산 106.9m).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탄금대
수용골산.
1)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2) 수용골산,삼봉,갈미봉,백중산. 3) 탄금대.
6.7km에 3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고도표.
미리 준비한 표지기.
국보 제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먼저 답사하고 '수용골산' 원점회귀 지점인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입상' 입구에 버스를 댔다.
주소는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39-9>
계단길 150m를 올라 다시 강변으로 내려선 지점에 남한강을 바라보며 마애불이 있다.
계단 입구의 안내판을...
차례대로 일별한 뒤...
나즈막한 산 위에 올랐더니 정자와 최근에 세워진 듯한 오층석탑이 있다.
다시 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섰더니 데크쉼터...
더 내려서야만...
남한강변의 마애불을 친견할 수가 있다.
뭉툭코에다 목부위까지 늘어진 귓불의 얼굴부위는 돋을 새김인 듯하고, 아래 몸통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높이는 4m정도.
유난히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몸통부위는 철분이 함유된 탓이지만 임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장군의 피눈물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금가대교'.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른다.
되내려온 곳에서 맞은 편 골목이 수용골산 입구.
수로를 끼고 가다...
도로를 굴다리로 건넌다.
농로로 이어지는 길에서...
앞서가던 일행들이 지역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입을 막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었고, 그 지역민은 친절하게도 산길을 세세히 가리켜 주고 있다. 그러니 흰둥이 마저도 이쁘다.
농가 정자에 목판이 걸려있어...
가까이 당겨보니 '청금정(聽琴亭)'.
청금정은 우륵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켜면 그 청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자라는 것.
향토사가들이 전해내려오는 여러 정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청금정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농가의 청금정은 그것을 빌려온 것인 듯.
우로 휘어지는 산길은...
정문묘원(鄭門墓園) 입구. 우측 묘원으로 올라가지 말고, 좌측 산길로 비스듬히 능선 끝자락으로 붙는다.
능선 끝자락 아래에 자연석비가 있어...
살짝 내려서 살펴 보았더니 충주 출신 정호승(鄭昊昇, 본명 정영택(鄭英澤), 1915~?)시인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알던 '정호승(鄭浩承, 1950~ )'시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시인은 1930년대에 활동한 시인으로, 문예지 '조선문학'의 발행을 주도하며 한국 문단을 풍요롭게 한 시인이다.
충북 북부지역 농촌을 배경으로 향토색 짙은 언어와 정서로 일제강점기 수탈당한 농촌의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유려한 리듬으로 노래하여 지역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1948년 김구 선생과 함께 북한에 다녀오는 등 우리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인물이지만, 1950년 월북 이후 그의 존재와 생애는 지워지고, 시는 잊혀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고 한다.
1939년 시집 '모밀꽃(조선문학사)'을 출간하였고, 월북 인사다.
- 모밀꽃 1 -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양
햇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꽃
모밀꽃은/ 하이얀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꽃
모밀꽃은/ 가난한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 - 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말없이 시드는꽃
<정호승(鄭昊昇) 본명 정영택(鄭英澤)>
숲길로 접어들자 후텁지근한 기온은 숲그늘에 사그라져 버리고...
곧 수용골산에 이르게 된다. '水龍谷山'이라고 이름지었다.
묘지를 지나자...
좌측으로 철조망이 마루금을 잇는다. 사유지인 듯.
다시 무덤을 지나자...
오늘의 최고봉인 삼봉.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었다. 빨간색 '부산 한마음산악회' 시그널은 뭐꼬?
알고보니 '부산 한마음산악회' 이희도 회장님이 사비로 제작한 것.
다시 숲속 희미한 산길.
어쩔 수 없이 철망을 넘어 임도에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내려서는 길에 간간이 소똥무더기가 보이더니...
철문에 이른다. 갈미봉 능선은 철문 우측으로 내려앉아 있어 올라서야 하지만 할머니 한분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산에서 내려온다.
사연인즉 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철망 울타리를 쳐놓았는데, 우리들이 타고 넘으면서 철망을 훼손했다는 것.
"할머니, 훼손하지 않고 곱게 넘어왔으니 마음 놓으시라요." 아무리 타일러도 곧이 듣지 않는다.
"할머니, 우리는 요 위의 갈미봉에 올라가야 하는데, 그라믄 어데로 가야 하는 데요?"
"어데로 가기는... 저 뒤로 둘러 올라가던지 하소."
<돌아본 사진> 그래서 철문을 지나 50여m 지난 지점에서 화살표 방향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 올랐다.
곧 능선에 이르자 능선 우측으로 철망이 이어지고 있다. 소가 타넘지 못하도록 한 울타리로,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철망이다.
갈미봉에 올라...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극성스런 모기떼의 습격으로 딱 두 숟가락만 먹었다.
내려서는 길에 폐축사가 보이고...
지친 심신에 노란 원추리의 위로를 받는다.
폐축사에서 내려서는 길은 임도급 묵은 길.
임도는 점차 뚜렷헤지더니...
농가에 내려서...
돌아본 모습.
곧 포장임도에 내려선 뒤 더위에 지친 회원들이 탈출을 계획하고...
우리들은 계획된 백중산을 향하여 주차해 있는 회물차 앞으로 간다.
농막을 지나자 맞닥뜨린 '전기휀스'에 움찔한다. 휀스우회를 시도해 보지만 불가.
그렇다면 또 월선(越線)은 불가피하였다.
숲속 산도라지와 눈맞춤하고...
잠시 오르면 백중산. '百中山'이라 명명하자 '충주 야산4봉' 완등이 백발백중 이루어졌다.
하산길에서 내려다 보는 남한강.
멀리 시원한 풍광이 열리고...
우리가 내려서는 길은 삼나무 숲.
삼나무는 흡사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아 있다.
내려서는 곳에 우사 지붕. 우리는 우사 우측 임도를 따라 내려설 것.
농로에 내려서서...
우사를 지나 사과밭을 우로 돌아...
도로를 굴다리로 건너게 된다.
굴다리 앞에서 도로의 이정표는 '소일교차로'.
교통량이 뜸한 도로를 건너면 '연아밥상'.
문화유적 안내판을 따라가다...
새로 단장한 사당으로 가까이 가본다.
담넘어 까치발을 하니 세칸 한옥.
안내판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경공 장암 정호(1648-1736) 사당'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 8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89년에 을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고, 이후 숙종 20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기용될 때 재등용되었고 당쟁의 와중에 부침을 거듭하였으나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장암 정호는 누암 서원에 우암 송시열, 노봉 민정중, 수암 권상하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서원철폐로 누암 서원은 훼철되었고, 후손들이 서원의 건물 중 북청 향현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장암 정호 사당으로 유지하고 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곳.
그곳엔 산행 뒤끝에 남겨둔 문화재가 있다.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충주 창동리 여래입상'이다.
충주 창동리 석조약사여래입상(忠州 倉洞里 石造藥師如來立像)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 판석 1매에 보주형 광배와 불신을 부조한 불상으로소발위에 두터운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며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쪘다. 양귀는 어깨까지 닿으며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왼손을 가슴에 대고 그 위에 약합을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위까지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다.
대좌는 장방형 판석에 연화문을 새기고 불상을 끼우도록 되어 있으나 원래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위키백과>
원래는 민가의 뒷뜰에 있던 것을 옮겨서 복원해 놓은 것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며 현재 맨 위의 머리장식이 없어진 채 그 받침돌만 남아 있고, 위로 오를수록 규모가 줄어드는 탑신의 각 몸돌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기 다른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5층에서만 한가지 돌로 되어 있다.
기단 위에 괴임돌을 끼워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고 있고, 각 층 지붕돌 위에도 비슷한 괴임을 표현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구성이 간소하다.
두 문화재의 안내판.
바로 옆에는 전통민속주인...
충주 청명주(忠州淸明酒)가 있다.
알코올 도수가 18°∼20°로 일반 곡주보다 높아 충주에서 마시면 문경새재에 가서 취기가 깬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순 찹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끈기가 있고 후유증이 없는 것이 특징이란다.
불과 100여m 떨어진 지점에 우리 버스가 있다.
일찍 내려와 쉼을 하고 있는 일행들. 우리는 농가 수돗가에서 대강 씻은 뒤 버스에 탑승하여 탄금대로 향한다.
탄금대는 주말이나 공휴일엔 대형버스 진입금지라는 안내판이 입구에 붙어 있다.
시행하느냐,마느냐 망설였던 일정이다.
온나라가 비 피해를 입었고, 인명피해도 발생하였다.
사회의 안전은 모든 국민이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
다만 표정관리에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첫댓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