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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너울 우리문화사랑회 원문보기 글쓴이: 그림9
거란의 침입
993년(성종 12)부터 101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3차례에 걸친 거란의 고려 침입.
10세기초부터 14세기말까지 중국대륙에서는 거란·여진·몽고 등 북방민족이 대두하여 중원의 한족(漢族)을 압박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중국의 역대왕조와 친선관계를 유지했으나, 북방민족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정책을 취했다.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동족인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국가로 보고 배척했다. 거란은 942년(태조 25)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교빙을 청했으나, 태조는 이를 거절했고, 나아가 훈요10조(訓要十條)에서도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단정하여 경계하도록 했다.
그후 역대왕은 이러한 태조의 반거란정책을 계승했다. 정종(定宗)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30만의 광군(光軍)을 조직했고, 광종(光宗)은 서북지역에 여러 성을 쌓아 거란에 대한 경계를 엄하게 했다. 또한 이 무렵 발해의 유민들은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우고 송(宋)·고려 등과 통교하면서 거란을 적대시했고, 송과 연합하여 거란을 협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큰 위협을 느낀 거란은 배후의 강적인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국내정치가 안정되는 성종대(聖宗代)에 이르러 986년에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991년에는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한 후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993년에 거란의 소손녕(簫遜寧)은 80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북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서희(徐熙)는 이에 반대하고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다.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나아가 압록강 동쪽 약 280리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몰아내면서 흥화진(興化鎭:의주)·용주(龍州:용천)·통주(通州:선천)·철주(鐵州:철산)·구주(龜州:구성)·곽주(郭州:곽산) 등 강동6주(江東六州)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처럼 고려는 강동6주를 차지하여 군사거점으로 삼으면서 송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청하는 등 송과 교류를 계속했다. 그러자 거란은 이에 큰 불만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거란은 강동6주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탈환하고자 했다. 이렇게 기회를 노리던 중 고려에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1010년에 다시 고려에 침입했다.
그리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국왕이 나주(羅州)까지 피난가기도 했으나,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라는 실리도 없고 실현가능성도 희박한 강화조건에 만족하고 철수했다. 이는 흥화진·구주·통주·서경 등 요새지를 함락하지 못한 채 개경까지 깊이 들어온 상태에서 병참선이 차단되어 역습당할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뒤 거란은 고려가 국왕의 친조약속을 지키지 않고, 강동6주의 반환요구도 거절하자 1018년(현종 9) 또다시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감찬 등이 흥화진·구주 등지에서 거란군에게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주어 그들의 의도를 제지시켰다.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목적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려와 송의 반거란 연합전선의 형성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거란은 소손녕과 서희가 회담을 할 때부터 고구려의 영토는 거란의 소유라면서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요구했고, 그후에도 고려가 개척한 강동6주를 계속 요구했다. 또한 당시 거란은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둘러싸고 송과 대치했으며, 압록강 유역에서 거란에 의해 밀려난 여진족과 발해유민과도 적대관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발해유민도 송과 군사적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거란에 대항하고자 했는데, 여기에 고려가 가세한다면 거란에게는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란은 송을 침략하기에 앞서 먼저 고려를 침으로써 배후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019년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강화를 위해 1029년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았다. 또 1033~44년 전국경선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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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
성종 12년, 서북쪽에 자리잡은 여진이 고려 조정에 알려 왔습니다.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서 고려를 치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곧 군신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대신들은 여진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진이 우리 고려를 속이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오."
"맞습니다~!"
따라서 조정은 여기에 아무런 대비책도 세워놓지 않았습니다. 8월에 되어, 이번에는 여진이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고려 조정은 황급히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만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일이 급해지자 여러 도의 군마 제정사를 나누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양을 하군사로 삼은 조정은 그히 거란군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을 보내고 난 성종은 친히 서경을 거쳐서 안북부까지 나가 정세를 살폈습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봉산군으로 쳐들어오는 한편, 고려군으 선봉인 윤서안 등을 사로잡았습니다.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을 구원하려고 하자, 소손녕은 큰소리를 쳤습니다.
"우리는 이미 고구려 옛당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제 고려가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여 빼앗으려고 하니, 너희들을 토벌하겠다."
소손녕은 또 서희에게 글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사방 여러 나라를 모두 통일하고, 아직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은 나라를 기어이 소탕할 계획이니, 속히 항복하라.>
서희는 이 글을 보고 돌아와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이몽전으로 하여금 거란의 병영에 들어가서 화친을 교섭토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손녕은 콧대가 아주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80만의 대군을 집결해 놓고 있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짓밟아 버리겠다.
"너희들이 고려를 침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몽전이 거란병을 통해 물었더니, 손소년이 대답해 왔습니다.
"그대들의 나라 고려는 백성을 잘 보살피지 않아서,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리려 하는 것이다. 만일, 화친하기를 바라거든 모두 와서 항복을 하라~!"
이몽전이 돌아오자 왕은 군신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의견이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대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신 뒤에 중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항복하는 게 좋겠습니다.
또 어느 대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갈라 주고 화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장차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갈라 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백성들이 창고에 있는 곡식을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그ㅐ도 남은 곡식이 많아서, 적이 군량으로 쓰지 못하게 대동강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서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은 지킬 수 있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들의 강하고 약함에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적의 약점을 노려서 용감히 싸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식량은 백성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적의 군량이 된다하더라도 강물에 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하늘이 노하면 어찌하시렵니까?"
왕은 서희의 말을 듣고 남은 곡식을 강에 버리는 것을 중지시켰습니다.
서희는 또 한가지 계책을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땅이 모두 여진의 근거지가 되었으므로, 광종께서 가주.송성 등에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의 군사가 온 것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계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 고구려의 옛땅을 빼앗으려는 것은 사실은 우리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서희는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군대가 강해 보인다고 해서, 서경 이북의 땅을 갈라주고 화친을 맺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의 땅도 역시 고구려의 옛땅인데, 거란이 생떼를 쓴다면 그곳도 내줄 것입니까? 땅을 갈라 준다는 것은 자손 만대의 치욕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시옵고, 신들이 결전을 벌인 다음에 이 일을 논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래도 늦지는 않사옵니다."
다음에는 전민관, 이지백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임금들이 대를 이어 오느에 이르렀는데,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땅을 내 준다면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옵니까? 옛날 유비의 아들 후주가 촉나라를 다스릴 때, 그의 신하 초주가 후주에게 권하여 땅을 위나라에 바치도록 하여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옵니까? 통촉하옵소서~!"
한편,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뒤에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안융진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고려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소손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소손녕은 뜨끔하여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빨리 항복하라고만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장영을 화통사로 삼아서 거란군의 병영을 파견했습니다. 소손녕이 장영에게 말했습니다.
"대신을 보내어 면담토록 하자."
장영이 돌아와서 소손녕의 뜻을 전했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거란의 병영으로 들어가서 말로써 옳고 그름을 따져 적을 물리치고 공을 세우겠소?"
신하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습니다. 서희가 왕 앞에 나아가 말했습니다.
"신이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어 거란군의 진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로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짓게 되었습니다.
왕은 강 어귀에까지 나아가 서희의 손을 잡고 성공하기를 빌었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통역에게 면담 절차를 물었더니, 소손녕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큰 나라의 귀한 사람이니 마땅히 뜰에서 절을 하라."
서희가 말했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뜰 안에서 절을 하는 것은 마땅하나,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뜰에서 절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두세 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소손녕이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서희는 객관으로 돌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소손녕은 마침내 당 위에 올라 예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서희는 영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소손녕과 서로 읍절하고, 당 위에 올라 예를 행한 뒤에 마주 대하였습니다.
소손녕은 서희가 순순히 자기를 따라주지 않자 이상히 여기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것이오. 그런 것을 그대들이 침략하였고, 또 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멀리 송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치려는 것이오. 만일 내가 말한 대로 땅을 갈라 주고 화친을 한다면 무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공박했습니다.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이어받았으므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소. 만약 경계를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땅이오. 어째서 이것을 침략이라 하시오? 또한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땅이었는데, 여진들이 훔쳐살면서 간사하게 길을 막아서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사귀는 것보다 힘이 드오. 우리 고려가 지금 그대 나라와 교역을 하지 않는 것도 여진 때문이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도읍지를 돌려 주고, 성을 쌓아 도로가 통한다면 왜 그대들과 외교 관계를 트지 않겠소?"
서희의 말은 조리가 있었고, 목소리에는 강한 기개가 서려 있었습니다. 소손녕은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소손녕은 강화를 맺을 것을 허락하였으며, 잔치를 베풀어 서희를 위로하려고 하였습니다.
서희가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 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수고를 하는데 어찌 감히 내가 잔치를 즐길 수가 있겠소?"
소손녕이 말했습니다.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어찌 대접하는 예의가 없으리오."
소손녕이 굳이 청하는 바람에 서희는 잔치를 즐겼습니다. 소손녕은 모든 형편을 자세히 기록하여 거란 왕에게 알렸습니다.
"고려국에서는 이미 강화를 청하였으니, 군사를 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진영에서 7일 동안이나 머물다가 돌아왔는데, 소손녕은 서희에게 낙타 10 마리, 말 100필, 양 1천 마리, 비단 500 필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서희가 돌아올 때 왕은 친히 강 어귀에까지 나가서 맞았습니다. 이때 왕은 박양유를 시켜서 예물을 마련해 가지고 거란 왕을 방문하려고 하자 서희가 막았습니다.
"지금은 겨우 강 안을 되찾았으니 강 밖의 땅을 찾은 뒤에 수교를 하여도 되옵니다."
왕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강화하지 않으면, 뒤에 무슨 근심이 따를지 모르오."
드디어 왕은 박양유를 거란 왕에게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로서 서희는 한 치의 땅도 갈라 주지 않고 거란을 물리쳤습니다.
고려에 침입하였던 거란은 오히려 땅만 물려 주고 간 셈이 되었습니다.
이어, 서희는 성종 13년에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홍화진 . 용주 . 철주 . 곽주 . 귀주 등 여섯 고을을 차지하였습니다. 고려는 그 지방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그 일대를 '강동 6주'라 불렀습니다.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엮음 '이야기 한국사'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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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다시금 2. 3차 침입을 감행한다. 거란의 침입 구실은 목종 폐립 사건이었다.
거란에게 목종폐립 사건의 내막을 알려준 측은 동여진이었다. 여진은 당시 동 . 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서여진은 고려와 가까웠던 반면 동여진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1O10년 초에 좌사랑중 하공진이 동여진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보복으로 유종이 조공차 화주관에 온 여진인 95명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동여진 측은 거란왕에게 달려가 목종폐립 사건의 내막을 고변하고 되었고 한편 고려 조정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하공진과 유종을 귀양보냈다. 여진으로부터 목종이 강조에 의해 강제로 폐립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거란왕은 그 해 5월 고려 조정에 강조를 거란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1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이다. 거란의 침입이 예상되자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고 상장군 안소광을 도병사로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사 30만을 보내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시켜 거란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홍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홍화진이 포위되자 홍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성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거란왕은 부하를 시켜 화살로 고려군 측에 다음과 같은 펀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대들의 전임금 왕송이 우리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오왕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고려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답장을 하였고 거란왕이 재차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지만 고려군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왕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병력 20만을 인주 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은 강조가 머물고 있는 통주로 출동시켰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로 출동하자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그들과 대응하였다. 강조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1병력은 강조의 통솔 아래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병력은 통주 근방 산에, 제3병력은 통주성에 진을 쳤다.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조가 지휘하고 있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강조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오면 검차를 앞세우고 적을 공략하였다.
이 같은 고려군의 검차전략으로 거란은 더 이상 진군을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해야 했다. 그래서 거란은 야음을 틈타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률분노가 이끄는 별동부대로 하여금 고려의 본영이 있는 삼수를 급습하게 하였다.
몇 번에 걸쳐 승전을 거듭하던 강조는 적군의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나 군사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적을 삼수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군이 본영을 급습하자 고려군은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하였고 그 틈을 이용해 거란의 대군이 앞쪽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홍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사이에 거란군은 다시 곽주로 진군했다. 그러자 곽주 방어사 조성우는 야밤을 틈타 도망쳤고 대회덕, 이용직 등은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곽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양규는 별동대 7백 명을 이끌고 홍화진을 출발, 통주에 흩어져 있던 군사 I 천 명을 모아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적병 6천 명을 전멸시키고, 양민 7천여 명을 구해 통주로 후퇴했다.
이때 거란왕이 이끄는 20만 병력은 서경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었다. 이에 중신들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하지만 강감찬의 결사적인 반대로 현종은 백관들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몇 번에 걸쳐 죽음의 위험이 있었으나 중랑장 지채문의 호위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란군이 계속 남하함에 따라 현종과 백관들은 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나주로 피신했다.
한편 양규의 활약으로 후방에 진을 켰던 거란군의 기세가 조금씩 꺾이자, 이틈을 노려 고려 장수들은 패잔병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맹렬한 기세로 거란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구주의 별장 김숙홍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였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5백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이후 양규와 김숙홍은 병력을 합쳐 거란군 선봉대를 애전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때 개경에서 회군한 거란왕이 대군을 이끌고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바람에 고려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양규와 김숙홍은 이 전투에서 수십 대의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은 1011년 정월 별수없이 퇴각하게 된다.
이에 정성이 이끄는 고려 군대가 퇴각하는 거란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많은 병력을 수장시키고 강동 6성을 회복한다.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은 일단락된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 석을 내리고 은률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홍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홍 두 사람에게 공히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현종의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이 글은 양규의 용맹과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이 같은 기개를 본받아 그의 아들 양대춘도 최충이 '지조가 탁월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 방면에도 통달한 인재'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장수로 성장한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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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 번째는 고려국왕의 거란 입조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증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공식 천명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률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홍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홍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 20척을 이끌고 구두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여 퇴각해야만 했다.
이렇듯 쉴새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에 다시 야률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며 야률행평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 해 4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냉담했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6년 야률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들이 고려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하자 이듬해에 소합탁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O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홍화진으로 나아가 소가죽을 꿰어 홍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홍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 그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성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은 정면으로 맞딱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 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해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되돌아간 소배압은 거란왕에 의해 징계를 당하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 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다 준 그는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내 쉬기도 했으며, 1O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