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5 성탄 대축일
이사 52:7-10 / 히브 1:1-4 / 요한 1:1-14
올바른 교리와 올바른 실천으로서의 성탄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매년 성탄절 예배 때마다 낭송되는 익숙한 말씀들입니다. 또한 어제 들은 성탄전야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탄전야와 성탄 낮 예배에서 읽은 복음 간의 초점은 좀 다릅니다. 성탄전야 복음이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구체적인 장면에 집중했다면, 성탄 낮 복음은 이 세상에 오신 이 아기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교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전례말씀은 하느님의 태어남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증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를 교리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게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올바른 교리(orthodoxy)’, 그리고 ‘올바른 실천(orthopraxy)’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올바른 교리에 강조점을 둔 성탄 낮 예배의 말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부르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대단히 관념적이고 이론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시작을 읽으면 우리는 마치 창세기의 시작부분을 읽을 때 받는 느낌이 듭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모두 “한 처음”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창세기의 ‘한 처음’은 그리스어 ‘제네시스(γένεσις)’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모든 존재와 사건의 기원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한 처음’은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무엇이 만물에 대한 근본인가에 대한 답으로서, 모든 존재의 근본원리 혹은 시초를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네시스와 아르케 모두 어떤 것의 시작과 근원이라는 측면에서 ‘한 처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구약의 제네시스가 이 우주와 세상이 전개되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신약의 아르케는 이 우주와 세상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창세기처럼 글을 쓰면서도 요한복음 저자가 ‘한 처음’을 제네시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왜 아르케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가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쓰기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건을 먼저 겪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요한은 머리를 써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사색하고, 그 사색의 결과로 예수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분을 만나서 그 분이 하신 말씀과 행적,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난 뒤에, 사람이면서도 사람을 초월한 그 분의 신비한 매력에 사로잡혔고, 자신과 사람들을 사로잡은 그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기도하고, 사색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도달한 자신의 신앙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교리(독사, δόξα)가 있기 전에 실천(프락시스, πρᾶξις)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탄절에 공관복음이 증언한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를 먼저 선포하고, 그런 다음 요한복음이 증언한 이 아기 예수가 ‘한 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는 오랫동안 ‘무엇을 믿느냐’라는 것을 가지고 씨름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났고, 교회는 그러한 교리를 ‘잘못된 교리(Heterodoxy)’로 단죄하고 ‘올바른 교리(orthodoxy)’를 설파하면서 교회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때론 그러한 노력이 극단으로 흘러서 독선적인 모습으로 변형되어 급기야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믿느냐 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라는 실천에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론적 논쟁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리적으로 결을 달리한 교단들 간에 공동선(共同善)을 향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다른 종교와 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도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공회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세계에 있는 경제적, 민족적, 국가적, 계층적, 심지어 종교적 헤게모니 등과 같은 각종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 기준점이 모호해지고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왕왕 종교인들은 상대주의적 세계 속에서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길을 잃을 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복잡한 관계들과 이해들로 뒤엉켜진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성육신의 실천을 수행해 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두 명의 요한으로부터 본받길 권합니다. 한 분은 오늘 복음에 묘사된 세례자 요한이고, 다른 한 분은 오늘 복음을 쓴 사도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고, 세례 받고,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본분에 맞는 삶을 살아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삼으려 하자, 자신은 빛이 아니라 다만 빛을 증언하러 파견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처럼 세상 안에서 빛을 증언하면서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본질을 망각하지 않은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가히 올바른 실천(orthopraxy)의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올바른 실천의 본보기였다면, 사도 요한은 올바른 교리(orthodoxy)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애제자로 불림 받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그저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러한 사랑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나온 건지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성찰의 열매를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이라는 틀 속에 가두지 말고, 육적인 눈을 초월하여 영적인 눈을 떠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어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 보라고 초대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시대의 한계를 관통하는 진정한 구세주임을 깨닫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만이 베들레헴이라는 구체적 장소에 태어난 마리아와 요셉의 아기 예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올바른 교리를 우리에게 전해줌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는 이 세상의 상대주의 가치를 뛰어넘는 참 빛이요, 참 진리가 된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들이 상대화 되고 그래서 어떤 것이 참다운 진리인지 모호해지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서양에선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보다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라고 하고 있고, 이것이 타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을 배려하는 관대한 모습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상대주의적인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점차 불편해하고 다시 마구간 속에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은 마구간에 오신 이 아기가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가져오신 빛임을 고백하고 찬송합니다.
그 옛날 이 빛이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어둠을 마침내 밝게 비추었듯이, 오늘날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물질문명과 세속사회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기념하며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그 빛을 증언하고, 사도 요한처럼 그 빛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참 본질임을 선언합시다.
말씀이 살(肉)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